[특별기고] 작가 최인호 선생 영전에…

[특별기고] 작가 최인호 선생 영전에…

뉴스1 제공
2013.09.26 19:20

-늘 푸르른 웃음을 그리워하며-

(서울=뉴스1) =

故 최인호 작가와 가까웠던 언론인 이기창씨./뉴스1  News1
故 최인호 작가와 가까웠던 언론인 이기창씨./뉴스1 News1

이 글은 추모사가 아니다. 필자의 마음에 각인된 ‘사람 최인호’ 에 대한 추억의 편린들이다. 물론 고인과의 교유는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을 지음(知音) 못지않은 소중한 인연으로 간직하고 있다. 언론의 공적 공간에 지극히 주관적인 개인감정을 토로한다는 사실이 못내 저어하다. 너그러운 이해를 부탁드린다.

“아니, 환갑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격문을 쓰라니요, 허허허~.”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최인호씨의 목소리에선 다소 멋쩍어하는 기색이 묻어 나온다. 그러면서도 흔쾌히 원고청탁을 받아들인다. “누구 부탁인데 안 쓸 수 있나요”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특유의 사람 좋은 너털웃음이 뒤따른다. 4강 신화를 일구며 온 국민을 열병에 들게 한 2002년 ‘한일월드컵축구’ 때의 얘기다.

당시 한국일보에서 월드컵지면을 책임지고 있던 필자는 대회 개막 몇 달 전부터 지면계획을 준비하면서 개막 당일자 아침 신문에 내보낼 격문(檄文)의 필자로 최인호씨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한국대표팀의 선전을 염원하는 격문이었다. 최인호씨는 몇 년째 언론사의 빗발치는 원고청탁을 사양하느라 곤혹을 치르던 무렵이었다. 실제로 몇몇 언론사에서도 똑 같은 청탁을 해왔지만 거절한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격문은 참으로 명문이라는 평을 들었다. 청년의 마음이 아니면 결코 쓰기 쉽지 않은, 싱싱한 글로 가득 차 있었다. 피를 들끓게 하는 마법의 힘과 격조까지 아우른 격문이었다.

이 격문 요청 전에도 그랬지만, 그 후에도 필자는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그를 괴롭혀야 했다. 그런 귀찮음을 그는 예의 너털웃음과 함께 기꺼이 받아주었다. 참으로 그에게 많은 글빚을 진 것이다. 언젠가는 그 빚을 갚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영영 갚을 길이 없게 되었다. 늘 푸르른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던 그 모습을 더 이상 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최인호씨가 먼 길을 떠났다. 향년 68세, 너무도 안타깝고 아쉬운 나이다. 뜻밖의 부음을 접하고 후회가 먹구름처럼 밀려든다. 중학동(한국일보)을 떠나면서 필자 스스로 연락을 유보했었다. 그러던 2006년께로 기억된다. 암 투병 소식을 알게 된 뒤 전화를 두어 차례 했지만 “조금 기다렸다가 만나는 게 좋겠다”는 부인의 말을 듣고 차일피일 연락을 미뤄왔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고 무심해졌다. 모두 게으름의 소치다.

고인 생전에 식사를 함께 하고 술잔을 나누던 일, 따님을 출가시키며 기뻐하던 모습, 간혹 술자리에서 시가를 물고 연기를 내뿜으며 짓던 멋스러운 표정, 그 모든 기억들이 새롭다. 만날 때마다 새로운 화제를 들고 나온 그였다. 늘 비움과 채움의 연속이었다. 한없이 소탈한 성격 또한 어떠한가.

쐐기문자를 방불케 하던 그의 육필 원고도 그립다. 그의 악필은 전설이었다. 모든 신문사가 컴퓨터로 작업하던 시절에도 그는 200자 원고지에 만년필로 바람에 날리듯 휘갈겨 쓴 원고를 보냈다. 처음 그의 원고를 대하는 기자들은 해독이 거의 불가능했다. 마치 지렁이가, 개미가 기어가는 형상을 한 글자를 보고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거의 암호수준이었다. 납활자 시절 그의 원고만을 전문적으로 채자하는 문선직원이 따로 있었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언젠가 워드프로세서로 원고를 쓰면 편리하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떠보았다. 돌아온 답인즉 “모니터 앞에만 앉으면 생각이 탁 막혀요”라고 해서 서로 배를 잡고 웃은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던 그가 어느 때부터 기자들을 암호해독의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출판사의 도움을 빌려 워드프로세서로 정리된 원고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마냥 낯설게 느껴졌다.

그의 문학으로 잠시 눈을 돌려보자. 오늘(26일) 아침 배달된 조간신문에 난 관련 기사를 읽고 인터넷을 검색해보았다. 그 기사들을 토대로 짧게나마 그의 문학적 삶을 재구성한다. 사실 최인호씨만큼 상찬과 비난의 양극단이 교차한 작가도 그리 흔치 않다. 하지만 그런 세평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에게 처음부터 대중작가의 낙인이 붙은 건 아니었다. 서울중·고교를 나온 그는 연세대 영문과에 진학했다. 고교 2학년 때인 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단편 ‘벽구멍으로’가 당선작 없는 가작에 입선함으로써 문학적 천재성은 일찍부터 싹텄다. 최인호씨가 한국일보의 원고청탁을 거의 거절하지 않은 까닭은 한국일보가 문학적 고향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고 짐작해보곤 했다. 물론 필자만의 짐작이지만 간혹 사적인 자리에서 에둘러 하는 말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군 복무 중이던 67년 그는 22살의 나이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면서 아예 ‘당선소감’을 함께 보낼 만큼 자신감이 넘쳤다. 등단 이후 ‘술꾼’ ‘타인의 방’ 등 문제작을 쏟아내자 60년대 김승옥의 감수성 혁명을 이어 갈 작가라는 상찬도 받았다. 28세 때 한 일간지에 '별들의 고향'을 연재했다. 낙양의 지가를 올린다는 말이 무색했다. 마침내 소설 100만부 시대를 열었다. 소설뿐만 아니었다. 영화, 대중음악 작사, 방송 다큐멘터리 등 그의 활동은 전방위로 뻗어갔다. 당시 그의 소설은 물론 원작이나 시나리오를 통해 그가 손댄 영화는 무조건 흥행에 성공한다는 신화를 낳았다.

‘어느새 그(최인호)는 미니스커트, 송창식의 통기타, 칸막이가 있는 생맥주 집 등과 함께 70년대 저항적인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돼 있었다.’(장석주 『나는 문학이다』 )

말 그대로 청년문화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문단의 시선은 갈수록 싸늘해져 갔다. 그를 ‘호스티스 작가’ ‘퇴폐주의 작가’로 낙인찍자 평론가 김현씨에게 "내가 못마땅하면 내 이름을 평론에서 빼시오”라고 한 뒤 평단과의 인연을 끊은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1980년대 들어 최인호 문학은 일대 전기를 맞는다. 불혹을 넘기면서 갈무리해놓았던 문학적 자산을 차례차례 세상에 펼쳐 보인다. ‘잃어버린 왕국’(1986), ‘왕도의 비밀’(1995) 등 역사소설, 경허선사의 일대기를 파헤친 ‘길 없는 길’, 조선 순조 때 인삼무역으로 최대의 부를 이룬 거상 임상옥의 일대기를 그린 장편 ‘상도’, 유교문화를 다룬 ‘유림’ 등 시대감각에 맞는 작품을 잇따라 내놓는다. 작가 최인호의 역사의식과 저력이 살아 숨 쉬는 작품들로 원숙한 삶의 깊이와 사고(思考)의 힘이 배어 있다. 그는 87년 어머니의 죽음 이후 가톨릭에 귀의한다. 독실한 가톨릭신자이면서도 한국의 불교와 유교적 전통과 정서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이해한 작가였다.

살아생전 고인에게 문학은 무엇이었을까? 필자는 문학평론가도 아니고 문인도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의 독자일 뿐이다. 다만 중학동 신문사 시절 공적인 만남에서 비롯돼 비록 제한적인 범위이긴 하지만, 사적 만남으로까지 그 폭을 조금씩 넓혀가는 동안 고인에게 문학은 구원의 길, 구도의 길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근대 한국불교 중흥조로 불리는 한말의 선사 경허 일대기를 그린 신문연재 소설 ‘길없는 길’처럼 최인호씨는 길없는 길(無路之路)에서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주는 화두(話頭)로 문학을 참구(參究)하지 않았나 싶다. 길없는 길은 아무도 가지 못한 길이다. 아니, 갈 수 없는 길이다. 눈밝은 수행자의 심안(心眼)이 아니고선 영원히 볼 수 없는 길이다. 자기완성의 길이고 깨달음의 길이다. 그는 이승과 작별하는 그날까지 쉼 없이 그 길을 향해 걸어갔을 것이다. 그의 삶의 궤적이 그런 믿음을 갖게 한다. 타고난 천재성에 각고의 노력까지 더해 자신의 문학적 지평을 끝없이 확장해나간 그가 아닌가.

문득 절집의 시 한 수가 떠오른다.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삶이란 한 조각 뜬 구름 일어남이요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 죽음이란 그 조각구름 스러짐이라네

영원한 청년 최인호는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이기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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