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2월3일, 원혜준양 유괴 사건

38년 전 오늘인 1987년 12월3일. 평화롭던 서울 강동구 삼전동(현 송파구 삼전동) 주택 앞에서 끔찍한 유괴 사건이 벌어졌다. 유괴 살해범 함효식(당시 25세)은 이 집에 살던 원혜준양(6)을 유괴한 뒤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돈을 뜯어냈다. 그러나 유괴 다음 날 혜준양을 살해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이듬해 사형에 처해졌다. 당시 혜준양을 찾기 위해 온 국민이 마음을 모으고 전두환 당시 대통령까지 직접 나섰지만 혜준양은 끝내 43일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1987년 12월3일 오후 12시30분쯤 삼전동 집 앞에서 혜준양이 함효식에게 유괴당했다. 함효식은 아이를 유괴한 다음 날 살해했는데 이후 혜준양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계좌번호를 알려주며 몸값 500만원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아이가 살아있는 듯 꾸민 것이다.
혜준양 아버지는 딸을 찾기 위해 함효식이 요구한 돈을 모두 보냈는데 이후에도 혜준양 소식은 알 수 없었다. 함효식은 이 중 250만원을 빼간 뒤 한동안 연락이 없다가 지불 정지를 풀라며 다시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MBC 뉴스에 보도된 내용을 보면 혜준양 아버지는 "애기(아이)하고 목소리 통화 해야죠"라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그러자 함효식은 "지불 정지 풀면 꼬마 있는 장소를 얘기해주겠다"고 맞섰다.
함효식은 다시 현금 인출을 시도하다가 경찰 수사망에 걸릴 뻔하자 달아났다.

경찰은 용의자를 특정해 붙잡기 위해 함효식이 혜준양 가족에게 건 협박 전화를 토대로 성문(목소리 지문) 분석 수법을 썼다. 이 사건에서 처음으로 범인을 잡는 데 성문 분석이 쓰였다. 수사 초기 용의자를 '경기도 말씨를 사용하는 고졸 이상 20대 청년'으로 추정했다.
혜준양 사건은 전 국민 안타까움을 사면서 '혜준양 찾기' 범시민운동도 벌어졌다. 서울시는 전단 20만장을 만들어서 뿌렸다. 또한 경찰에 "혜준양 닮은 아이를 본 것 같다", "범인 목소리를 들어본 것 같다" 등 제보 전화가 빗발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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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범인을 잡기 위해 "지금이라도 자수할 경우 법의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겠다"고 밝혔다.
사건 실마리가 풀리지 않자 전두환 당시 대통령까지 직접 나섰는데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강남경찰서를 예고 없이 방문해 신속한 검거를 당부했다. 또한 혜준양 집에 들러 부모를 위로하기도 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경찰에 "자녀를 가진 모든 시민이 안심하고 사는 사회가 돼야 한다"며 "유괴 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은 곧바로 공개수사를 펴고 전 국민이 수사관이 돼 유괴범이 우리 사회에 발붙일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범인 검거를 위해) 범인이 자수하면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겠다"고 밝혔다.

경찰 수사가 진행되며 범인은 함효식으로 좁혀졌다. 이를 알아챈 함효식은 유서를 남기고 한강에 뛰어든 것처럼 꾸미기도 했다.
이때 경찰은 함효식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강원 홍천 처가를 찾기도 했는데 함효식 부인은 "남편이 어젯밤 전화로 애를 잘 낳아서 잘 키우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추후 함효식 범행 동기가 결혼 자금 마련이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더욱이 아이 출산을 앞둔 상황이었던 것으로 파악되면서 충격을 줬다.
함효식은 결국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그는 초기 경찰 조사에서 살해 범행을 덮으려 "트렁크를 열어보니 혜준양이 숨져 있었다"는 취지로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결국 범행 43일 만에 자백했다.
이에 현장 검증을 통해 혜준양 시신도 43일 만에 찾을 수 있었다. 함효식은 혜준양을 유괴한 뒤 인적이 드문 곳에서 목을 졸라 숨지게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어 시신을 강원 홍천 야산에 암매장하면서 실족사로 위장하기 위해 손, 발 등에 묶었던 끈을 풀기도 한 것으로 조사됐다.
함효식은 1988년 4월 사형을 선고받았고 같은 해 8월 사형에 처했다. 그는 사형 집행 전 혜준양에게 사죄의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