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왜 좌절하나]⑤ '정병'·'멘헤라' 자조…사회 문제마저 개인 책임으로

한국 청년들의 좌절과 분노는 거리의 시위 대신 삶의 주요 단계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연애와 결혼, 출산은 물론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하는 이른바 'N포 세대' 이야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과거 기성세대가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었다면, 오늘날 청년들 사이에서는 태어난 것 자체를 원망하는 '낳음 당했다'는 자조적인 표현까지 등장했다.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의 과도한 경쟁과 자산 격차,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문화가 이같은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진단한다. 'N포 현상'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응하기 위해 청년들이 택한 '극단적 적응'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실제 결혼과 출산을 계획하지 않는 청년들도 적지 않다. 국무조정실의 '2024년 청년의 삶 실태조사'에 따르면 미혼 청년 중 결혼 계획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2022년 75%에서 2024년 63.1%로 11.9%포인트(p) 하락했다. 같은 기간 자녀 출산 의향도 63.3%에서 59.3%로 낮아졌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청년들은 삶의 어려움을 사회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고 제도변경을 요구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한다"며 " 쉬었음 청년이나 출산파업처럼 조용한 형태로 소극적인 저항과 극단적 체념 형태로 표출되는 식"이라고 말했다.
부모의 경제력 등 타고난 환경의 격차도 청년들의 무력감을 키우는 요인이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우리 사회에선 부모의 재산이나 출신 지역 등 개인이 바꿀 수 없는 조건들이 삶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친다"며 "공공정책이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지 못할 때 사회 문제로 인식하기보다 부모를 잘못 만났다는 상대적 박탈감에 빠지기도 쉽다"고 말했다.
좌절과 분노는 집단적인 저항보다는 개인의 내면으로 향한다.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무능이나 실패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도 나타난다. 청년들이 스스로를 '정병'(정신병의 줄임말)이나 '멘헤라'(정신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을 뜻하는 일본 신조어)라고 부르며 자조하는 현상이 대표적이다.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 '헬조선'이라는 표현이 잘못된 사회 시스템을 비판했다면, 최근에는 '정병', '멘헤라' 같은 표현으로 문제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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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일적인 삶의 경로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도 청년들의 선택지를 좁히는 요인으로 꼽힌다. '대학 진학, 대기업 취업, 결혼' 등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더 이상 안정적인 미래를 보장하지 못하지만, 여전히 이런 경로에서 벗어난 선택은 부정적으로 평가받기 쉽다는 것이다.
김헌식 평론가는 "우리 사회는 워킹홀리데이나 비혼, 아르바이트·비정규직 등 이른바 '정상성'에서 벗어난 선택을 하면 큰일이 날 것처럼 공포감을 조성하는 경향이 있다"며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파트타임 일자리가 일상적인 선택지지만 한국에서는 자신의 미래를 주체적으로 꾸려가는 사람들조차 비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어 "다른 삶의 경로를 선택한 개인의 결정을 존중하고 사회적으로도 긍정적으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청년들이 삶의 다양한 선택지를 가질 수 있도록 사회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거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와 달리 최근엔 공동체 문화와 공론장도 축소됐기 때문이다. 개인의 어려움을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공동의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 있는 환경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김성수 문화평론가는 "많은 청년들이 각자의 도전을 이어가고 있지만 시도가 파편화돼 세대 전체의 공감과 지지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며 "가족과 지역사회 등 전통적인 공동체가 무너진 뒤 청년들이 기댈 만한 건강한 공동체도 부족해 외로움을 느끼기 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청년들이 함께 대안적인 삶을 모색하며 서로를 돌볼 수 있는 공동체와 이를 뒷받침할 정책적 지원이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윤 교수는 "청년들이 진보와 보수, 남녀 등으로 나뉘면서 공통의 의제를 형성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서도 "진영을 넘어 청년들이 함께 겪는 문제를 논의하고 정치적 의제로 발전시킬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어 "개인의 어려움을 사회 구조의 문제로 바라보는 이른바 '사회학적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