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老총재의 피딱지와 피멍

[광화문]老총재의 피딱지와 피멍

박종인 기자
2002.04.04 11:59

[광화문]老총재의 피딱지와 피멍

다음 ㅇㅇ은 어떤 직업일까요?

①서울서 ㅇㅇ 2명 데리고 부산 가는 것 보다 돼지 10마리 몰고 가는 게 수월하다.

②ㅇㅇ와 거지의 공통점은.. `아침에 대책없이 집을 나선다'

③ㅇㅇ와 정자의 공통점은.. `사람될 확률이 거의 없다'

정답은 `기자'. 이같은 유의 `기자'에 대한 `쫑코'성 조크는 엄청 많습니다. 선배에게, 또는 취재원에게 `몰매'를 맞고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신세한탄할 때 이런 농담을 하곤 하죠. 외부에서 보면 화려해 보일지 모르지만 직접 해보면 기자는 `힘든 직업'입니다.

기자를 힘들게 하는 게 무엇일까? 기자들 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저에겐 `사람 만나는 일'입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며 살아도 짧은게 우리네 인생인데, 싫은 사람을 억지로 만나야 하다니. 정말이지 고역 아닙니까.

그래서 `좋은 취재원'을 많이 둔 동료가 늘 부럽습니다. 진한 향으로 우리의 찌든 때를 덮어주는, `인간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취재원 말입니다.

최근 물러난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가 그랬습니다. 그 분을 떠올리면 두 가지가 생각납니다. `콧구멍의 피딱지'와 `눈 옆의 피멍.'

제가 한은에 출입할 때 몇 번 그 분과 점심을 했습니다. 한번은 바로 옆에 앉아 힐끗 보니 콧구멍에 피가 말라붙은 빨간 딱지가 앉아있었습니다. 나중에 비서진에게 그 연유를 물어보니 "늘 밤늦게까지 책을 읽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이라 그러더군요.

한참 지나 제가 머니투데이로 자리를 옮긴 뒤 다시 점심을 함께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때도 옆자리에 앉았는데 오른쪽 눈 옆이 검게 멍들어 있는 거 아닙니까. 물어볼까 말까 한참 망설이다,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습니다. "총재님, 눈 옆에 멍은…"

"아, 이거 말입니까. 어쩔 수 없이 손자 얘기를 좀 해야겠네. 요즘 친구들끼리 만나서 누가 손자얘기를 꺼내면 다른 친구들이 듣기 싫다고 말리곤 하는데..그래도 정 얘기하고 싶거든 돈내고 하라 그러고..오늘은 내가 밥값내는 자리니 손자얘기해도 괜찮겠지요"라고 시작된 손자얘기는 상당 시간 지속됐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노년의 총재부부는 맞벌이 아들 내외가 틈틈히 맡기는 갓난애를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데…. 하루는 이 놈이 자꾸 울어대는 바람에…. 노총재께서 아이를 업고 나가 아파트 화단을 걸었는데….한참을 걷다 아이가 잠들어 다시 들어오던중 노총재는 잠자는 아이의 사랑스런 모습을 보려고 뒤돌아보다 `앗' 그만 현관 유리문에 얼굴을 부딪혔습니다.

우리는 언제 다시 밤늦게까지 책읽느라 콧속에 피딱지를, 그리고 잠든 손자를 뒤돌아 보다 얼굴에 피멍을 만드는 `소박한 한은총재'를 만날 수 있을까요. `인간의 향기' 물씬물씬 풍기는….

참고로 우리는 한은총재에게 '지갑'을 맡기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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