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재량권과 권위
최근 신임 대법관의 추천과 관련하여 법원 안팎에서 작은 “소요”가 있었다. 연공서열에만 치중하지 말고 사회 전반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던 반면, 대법관의 임명제청권은 대법원장의 고유권한이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양자의 갈등은 “이번은 그냥 넘어가고, 다음부터는 다른 목소리도 반영하겠다”는 절충형 약속에 의해 서둘러 봉합되었지만 이번 사건이 제기한 문제의 본질은 계속 우리 사회의 숙제로 남아 있다.
필자는 법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필자가 제기할 논점은 사계의 권위자가 심도있는 해설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다시 대법관 임명제청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이 문제는 제청권자인 대법원장이 보유한 재량권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라는 물음으로 재포장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재량권이라는 말을 할 때 그 권한을 “내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다는 자유재량의 뜻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필자는 몇 년전 미국에서 재량성과 관련하여 아주 충격적인 사건을 목도한 바 있다.
때는 2000년 가을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대통령직을 놓고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와 공화당의 조지 부시 후보간에 박빙의 경주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개표가 진행될 즈음 아주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당락의 관건을 쥔 플로리다에서 재검표가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플로리다 주법에 의하면 두 후보의 표차가 일정 수준이내의 접전이면 의무적으로 재검표를 해야 하고 그 결과를 일정 시한내에 선거관리 책임자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재검표는 문제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당락을 좌우할 정도로 유권자수가 많았던 마이애미의 일부 카운티에서 재검표에 신중을 기하다가 불가피하게 보고시한을 넘기게 된 것이었다. 선거관리 책임자였던 리처드 해리스 주정부 장관은 법에 규정된 마감시한을 기해 보고창구를 닫고 그 때까지 접수된 개표결과에 의해 다시금 부시의 승리를 선언하였다. 민주당은 즉각 이런 결정에 반발하고 주법원으로 사건을 가지고 갔다.
그런데 필자가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민주당의 법정 전략이었다. 당시 민주당이 입증하려고 했던 논점은 선거관리 책임자였던 해리스에게 재량권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필자의 영어실력으로는 해당 법조문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재량권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또 설사 재량권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왜 민주당에 유리한 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해리스에게 재량권이 있다면 해리스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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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필자에게 플로리다 주법원의 판결은 충격 그 자체였다. 필자의 눈에는 재량권의 흔적도 보이지 않던 법조문에서 법원은 재량권을 찾아냈던 것이다. 필자를 놀라게 한 또 하나의 사실은 일단 재량권이 입증된 후에는 양 후보 진영의 쟁쟁한 변호사중 어느 누구도 해리스가 기계적으로 재검표의 중단을 선언한 사실이 잘못이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해리스의 재량권은 자유재량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 변호사의 상식이었다. 정부기관의 행위에 관한 한 자유재량은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필자는 우리 사회가 선진사회로 발돋움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담당자에게 더 많은 권한을 위임하고 그들이 재량권을 가지고 판단하고 일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재량권은 “마음대로”가 아니라 “알아서 잘” 사용하는 재량권이어야 한다. 물론 궁극적인 심판은 법원의 몫이다. 법원이 솔선수범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권위의 실추가 아니라 권위를 올바르게 확보하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