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융통성'이 많은 나라
주한 미 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제프리 존스 변호사는 한국의 법체계가 이상하다고 불평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는 변호사가 아니더라도 법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법은 두리뭉실하게 해놓고 구체적인 사항은 시행령에 맡긴다. 그래서 변호사들도 법만 보고는 어떤 것이 금지되는지 아닌지 명확치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법이 정하는 바를 자세히 알고자 시행령을 뒤져보면 중요한 것은 또 무슨 행정규칙 등에 위임하고 있다. 결국 행정부 관료들에게 재량권을 많이 주어 그들이 위법여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게 되어있다.관료의 재량권은 부정부패로 통하는 지름길이다. 우리의 과거가 그랬고 중국의 현재가 그렇다. 법이 "법대로만" 집행된다면 굳이 재량권을 가진 중앙부처 공무원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지방분권이고 뭐고 따질 필요가 없다. 지방에 관공서를 짓고 공기업을 옮기는 것보다 중앙 공무원이 보나 지방 공무원이 보나 법규정의 해석이 똑같다면 지방에 있어도 인맥이나 정보가 없어 불리할 이유가 없다.
청계천 복원공사를 둘러싼 서울시 부시장의 구속 건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선진국에 가보면 역사적 유적지에 새로 짓는 건축물은 주변건물과의 조화는 물론 건물 높이가 엄격하게 규제되고 있다. 유럽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적으로 신생국가인 미국도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있다. 이민 역사가 오래된 뉴잉글랜드 지방은 물론 남부의 사바나, 찰스턴 같은 도시도 역사가 150년쯤 된 중심부가 4층 정도의 건물로만 빼곡히 채워져 있다. 갑자기 중간에 10층 건물을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청계천 주변의 경우도 애당초 이런 원칙을 세웠더라면 심사위원회에서 "청계천 4가 주변은 용적율을 800%로 해주고 청계천 5가는 또 얼마로 하고" 하는 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심사위원회가 재량권을 가지는 순간 뇌물의 가능성은 엄청나게 높아지는 것이다. 개발이익이 수백억원이라면 수십억원 정도 뇌물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
물론 행정부의 입장에서도 할말은 많을 것이다. 법에서 너무 세밀하게 규정하면 환경변화에 따라 법을 자주 바꾸어야 하는데 법률을 개정하거나 새로 만드는 것은 엄청나게 어렵다는 것이다. 일단 법이 만들어지면 이해당사자들이 생겨 법률조문 하나 바꾸는데도 엄청난 압력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래서 법은 자주 바꿀 필요가 없도록 두리뭉실하게 해놓고 쉽게 바꿀 수 있는 시행령이나 행정규칙에 구체적인 사항을 위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법을 만들거나 고칠 것인가. 기업경영에는 엄격한 투명성을 요구하면서 법의 제정이나 집행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두리뭉실 해석하고 넘어가자는 것인가. 시행령은 그나마 법전에 나와있지만 행정규칙 같은 건 담당공무원의 서랍 속에만 존재해 일반국민들은 읽어볼 기회도 없다.
우리나라의 법률과 규칙은 해석에만 융통성이 있는게 아니다. 집행책임을 묻는데도 상당한 융통성이 있다. 97년 환란의 책임을 물어 강경식 부총리와 김인호 경제수석은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2004년의 카드대란과 관련되어 책임을 지거나 재판을 받은 공무원은 없다. 카드대란은 금융감독의 시스템이 잘못된 탓이지 장관이나 위원장의 잘못은 아니라고 결론낸 듯하다. 아니면 장관급에게 책임을 묻자면 그 잘못이 환란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뜻일까. 예전에 어떤 장관이 "장관이 얼마나 좋은지 안 해본 사람은 몰라"라고 했다는데 정말 수긍이 가는 말이다.
독자들의 PICK!
잘 알다시피 신용카드의 남발과 감독소홀은 수백만명의 신용불량자를 낳고 이 때문에 국내소비가 타격을 받아 경기침체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래도 위장전입이나 자식의 국적문제만 없다면 책임을 안 묻는 시스템이 있기에 최근 공직에 대한 인기가 치솟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행담도 개발이나 S 프로젝트도 우리나라의 행정이 얼마나 융통성있게 집행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낙후된 호남 서해안 지역 개발 과제를 호남출신이라는 이유로 인사수석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그는 지역전문가도 아니고 개발전문가도 아니다. 융통성에도 원칙은 있어야 하는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