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퍼스, 주총 의결권 영향 막강...국민연금, 기업 생태계 바꾼다
#2004년 2월 월트디즈니 주주총회에서 대반란이 일어났다. 21년간 월트디즈니를 장악하며 '미스터 디즈니'라 불렸던 마이클 아이스너 회장은 이날 연기금과 소액주주들의 압력에 회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2011년 2월 애플 주총에서도 비슷한 이변이 발생했다. 애플이 '주주들의 독사과'로 불렸던 이사선출 방식을 변경한 것. 애플은 이날 단 한명의 주주만 찬성해도 이사를 선출할 수 있었던 기존 이사 선임방식을 버리고, 과반수 동의에 의한 이사선임을 택했다.
월트디즈니, 애플 등 굴지의 대기업을 뒤흔든 것은 바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공무원연금인 캘퍼스(CalPERS)다. '주주행동주의'로 유명한 캘퍼스는 매년 6월 초 기업지배구조 관찰리스트인 포커스리스트(Focus List)를 발표한다. 일명 '데쓰 노트(Death note)'라 불리는 이 리스트는 미국 기업들에겐 공포의 대상이다. 리스트에 오른 기업은 주가가 급등락하는 것은 물론 주주들의 집중 공격까지 받는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리스트에 이름이 오를까 두려워 자발적으로 지배구조를 개선하기도 한다.
한국에도 조만간 이 같은 '포커스 리스트'가 탄생할 전망이다. 대통령 직속 기관인 미래기획위원회가 26일 국민연금 등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 강화를 천명하고 나섰다. 미래기획위원회는 연기금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통해 대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것은 물론 시장의 취약한 공적기능을 키운다는 복안이다.
◇연기금 주주권 강화 기업 생태계 바꾼다
국내 증시의 최대 큰손인 국민연금은 매년 주주주총에서 의결권 행사를 늘리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존재감은 여전히 미미한 상태다. 의결권 행사가 일회성 사후공시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데다, 의결권 이외의 주주제안, 이사추천 등 주주권은 거의 행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사학연금, 공무원연금 등 여타 연기금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이유로 국내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는 단순 과시용이란 지적을 받고 있고, 해당 기업들조차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경영권 분쟁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신한금융 사태다. 국민연금은 신한금융의 2대주주임에도 불구하고 소수 일본 주주들보다 목소리를 내지 않아 비판을 받았다.
김지환 하나대투증권 리서치센터장은 "국민연금은 주요 상장기업의 주요 주주로서 원칙대로 주주권 행사해야 한다"며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단순 시세차익을 위한 일정 수준의 멘트가 아니라 경영권에 대해 할 말을 하면서 대주주의 사적 행사로 인한 부당한 일로부터 국민 재산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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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등 연기금들이 캘퍼스처럼 '포커스 리스트'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주주행동주의에 나선다면 어떻게 될까. 증시전문가들은 그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란 설명이다. 자산운용사 한 고위관계자는 "현재 국민연금은 웬만한 기업들의 주식은 모두 보유하고 있다"며 "어떻게 행동지침을 만드느냐 따라 달라지겠지만 단순한 주가 문제를 넘어 국내 기업 생태계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 국민연금은 작년 말 기준 지분 5% 이상 보유한 기업만 139개에 달한다. 그 면면도 삼성전자, 포스코, KT, 신한금융 등 국내 증시를 좌지우지하는 대표주들이 대다수다. 특히 삼성전자의 경우 이건희 회장(3.38%)보다도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연기금들이 주주권 행사에 적극 나선다면 펀드등 기관투자가들의 주주행동주의도 힘을 받을 것"이라며 "주주연대 등을 통해 강력한 감시, 견제 기능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연기금들이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해 기업 경영에 대한 감시와 견제 기능을 강화할 경우 지배구조 개선과 함께 주주가치 개선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란 기대다. 김선웅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소장은 "국내 상장사의 경우 작은 종목은 변동성이 심하고, 큰 기업은 기업가치보다 경영승계에 집중해 정체된 회사들이 많다"며 "연기금의 적극적인 주주행동주의는 이런 기업들을 각성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경영 족쇄될까' 기업들 노심초사
연기금의 주주권 강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주주가치를 높이는 측면도 있지만 자칫 경영 독립권과 경쟁력 강화에 족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전 산업에서 글로벌 경쟁을 펼치고 있는 국내 기업들은 한 템포 빠른 의사결정 및 투자를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해왔다"며 "하지만 연기금이 주주권 행사를 강화할 경우 일정부분 이 같은 의사결정이 지연돼 경영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연기금 주주권 강화에 앞서 연기금의 지배구조 등 독립성과 투명성부터 개선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금과 같은 정부 주도의 연기금 주주권 강화로는 연금 사회주의나 관치 논란만 키울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정치논리에 의한 관치목적의 지배구조 개선이나 지나친 경영권 간섭은 경영 안정화를 훼손해 기업가치 저하로 연결될 수 있다"며 "따라서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에 앞서 전문성, 독립성부터 확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선웅 소장도 "정부가 연기금을 통해 기업들을 간접지배하려 한다는 지적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연기금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