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증시 개조 프로젝트⑥ 운용 평가시스템]
#지난 8월9일 오전 8시.
연기금 자금을 위탁 운용하는 A자산운용사는 펀드매니저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미국 신용등급 강등이후 코스피지수가 5일 연속 폭락하자 보유주식을 매각해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짓기 위해서다.
이 운용사는 연기금 자금으로 시장 주도주였던 이른바 '차화정(자동차, 화학, 정유)' 주식을 대거 사들였지만 주가폭락으로 수익률 관리에 빨간불이 커졌다. 다른 위탁운용사들은 이미 보유주식을 처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 매각대열에 동참할 경우 손실만 커질 수 있다"는 쪽과 "지금이라도 던져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하지만 격론은 오래가지 못했다.
"연기금의 위탁운용사 평가시기가 코앞에 닥쳤다"는 말 한 마디로 정리가 됐다.
이 회사 펀드매니저는 "분기, 반기로 돌아오는 연기금과 기관투자가들의 평가 앞에 전망이나 분석 따윈 힘을 쓰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투자는 초장기, 평가는 초단기
국내 연기금과 기관투자가들의 위탁운용사 단기평가는 증시불안을 가중시키는 주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 연기금과 기관투자가들의 위탁운용사 평가기간은 3개월(분기평가)이 보통이고, 길어야 6개월(반기평가)에 불과하다. 초장기 자금을 운용하면서 평가는 초단기로 이루어지는 것.
전체 운용자산이 340조원에 달하는 국내 최대 '큰손' 국민연금은 반기마다 위탁운용사를 평가한다.
국민연금은 위탁운용사 반기평가 결과를 토대로 S, A, B, C 등 4개의 등급(각 25%)을 매기고, 최하의 C등급 중 평가점수가 일정수준을 미달한 운용사는 위탁자산을 줄이거나 아예 회수한다. 정략적, 정성적 평가가 함께 이루어지지만 평가결과는 사실상 운용수익률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12조원을 운용하는 사학연금도 국민연금과 마찬가지로 반기평가를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국민연금 다음으로 많은 80조원 이상의 자산을 운용하는 우정사업본부와 교원공제회는 이보다 짧은 분기평가 기준으로 위탁운용사를 평가하고 있다. 이외에 은행, 증권, 보험 등 기관투자가들은 대부분 분기평가가 일반적이다.
연기금 한 위탁운용 팀장은 "평가가 길어지면 새로운 위탁운용사 선정이 지연되고 재투자도 늦어진다"며 "더욱이 평가는 과거 3년치를 종합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단기평가라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독자들의 PICK!
업계관계자는 그러나 "코스피200등 벤치마크 기준으로 상대수익률을 평가하기 때문에 과거 성과가 좋았다고 해도 최근의 성과가 나쁘면 전체 평가는 나빠진다"며 "따라서 위탁운용사들도 최근의 평가에 신경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로스컷 보다 무서운 단기평가
위탁운용사들이 시세 추종적 매매에 나서는 것도 이같은 평가 시스템 때문이다. 시세 추종적 매매란 주가가 오르는 종목에 모두 올라타는 일종의 쏠림현상을 말한다. 이 같은 쏠림현상은 주가가 펀더멘털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자문사 대표이사는 "상반기 상승장을 주도한 '차화정 바람'의 일정 부분은 시세 추종적 매매가 만든 거품"이라며 "주도주에서 소외될 경우 단기평가에서 점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쏠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연기금과 기관투자가들의 단기평가는 상승장에선 쏠림현상으로 나타나지만 폭락장에선 투매현상으로 이어진다. 평가를 앞둔 위탁운용사들이 수익률 관리를 위해 보유주식을 대거 내던지면서 증시 추가하락을 부추기는 것. 연기금과 기관투자가들의 위탁운용사 단기평가가 일종의 '보이지 않는 로스컷(손절매)'으로 작동하는 것.
실제 코스피지수가 미국 신용등급 하락으로 폭락한 뒤 단기 반등한 지난 10일부터 17일까지 5거래일간 연기금과 은행 보험 증권 등 기관투자가들은 5644억원의 주식을 내달 팔았다. 조금이나마 손실을 만회하려고 증시 반등을 틈타 대거 주식을 처분한 것이다.
이중 상당 부분이 연기금 등의 자금을 위탁 운용하는 자산운용사와 투자자문사들의 매물인 것으로 업계에서는 보고 있다. 같은 기간 외국인은 1조7589억원을 순매도했고, 개인들만이 1조7589억원을 사들이며 나홀로 시장을 지탱했다.
자산운용사 한 펀드매니저는 "연기금과 기관들은 폭락장에서 로스컷 규정을 유연하게 적용하지만 단기평가로 인해 위탁운용사들이 알아서 로스컷을 한다"고 밝혔다.
◇"3~5년 이상 장기 평가해야"
정부당국과 운용업계에서는 국내 증시의 변동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수급의 핵심축인 연기금과 기관투자가들의 단기평가 관행부터 개선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장기성 자금의 성격에 맞게 평가제도와 방식도 장기적으로 재구축해야 한다는 얘기다.
감독당국 한 고위관계자는 "시장에 만연해 있는 단기성과 주의는 증시 변동성을 키우는 요인"이라며 "지금과 같은 단기평가 하에서는 장기 안정적인 성과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또 연기금과 기관투자가들이 장기 평가시스템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단기평가 관행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통상 연기금들의 내부 운용역 평가는 1년 단위로 진행된다. 내부 평가가 이렇다 보니 위탁운용 평가 역시 짧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이사는 "국내 대표 연기금인 국민연금의 기금운용본부장이 2년 주기로 바뀌는 마당에 장기적 운용과 평가시스템이 정착될 수 있겠냐"고 지적했다. 실제 1999년 11월 국민연금의 기금운용본부가 출범한 이후 11년간 기금운용본부장은 5번 교체됐다. 평균 재임기간이 2년 정도에 불과한 것. 최장 3년 임기보장을 채운 사람은 조국준 전 본부장 단 한명 뿐이다.
박덕배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성과평가 기간이 짧을수록 운용사들이 지나치게 수익률에 치중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연기금 기본적인 특성인 장기투자 원칙을 훼손할 수 있다"며 "해외 연기금들처럼 운용평가 기간을 3년 이상 장기적으로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