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예산이 860억 원 인 기관이 있다. 내년에는 우리나라의 미래 먹거리를 찾겠다면서 두 배 가까이 증가한 1561억 원의 예산을 신청했다. 글로벌 재정위기가 세계를 강타하고, 균형재정 압박이 거세지만 워낙 중차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어 증액은 순조로울 것 같았다. 하지만 소폭 삭감 정도를 예상했던 이 기관은 최종 확정된 예산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예비타당성 조사 등 몇 차례 심의를 거친 결과 새해 예산이 90억 원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예산이 1년 만에 10분의 1로 줄어든 이 기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식경제부 산하 연구개발(R&D) 전략기획단 얘기다.
지난해 6월 출범한 전략기획단이 불과 1년 만에 존폐 위기에 놓여있다. 민관 합동으로 운영되는 기획단은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출항했다. 오는 2020년까지 '세계 5대 기술 강국 도약, 10대 선도 기술 발굴, 100개 세계 1위 사업 육성' 등 표방했던 목표도 거창했다.
면면도 화려해 스타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이 단장을 맡고 민간 전문가 5명을 MD(Managing Director·투자관리자)로 영입했다. 반도체 메모리 용량이 1년마다 2배씩 증가한다는 '황의 법칙'이라는 신조어를 낳았던 황단장을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영입했을 때 정부는 "세계 최고의 반도체 전문가를 국가 최고기술책임자(CTO)로 모셨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기획단은 반도체, 휴대전화, 액정표시장치(LCD)를 잇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하는데 2018년까지 1조5000억 원을 투입해 2025년 380조 원의 매출을 올리겠다고 보고했고, 이 대통령도 "적극적으로 추진하라"고 힘을 실어줬다.
기획단은 내년을 R&D 사업 원년으로 삼고 △디스플레이(투명 플렉시블 디스플레이) △해양플랜트(심해자원 생산용 해양플랜트) △인쇄전자(인쇄전자용 초정밀 연속생산 시스템) △그래핀(다기능성 그래핀 소재 및 부품) △SMR(다목적 소형 모듈 원자로) △뉴로 툴(뇌-신경 IT 융합 뉴로 툴) 등 6대 핵심 사업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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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위해 내년 예산으로 1561억 원을 신청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그래핀과 SMR, 뉴로 툴 등 3개 사업은 예산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나머지 3개 사업도 각 사업 당 30억 원씩 90억 원만 배정됐다. 예산심의를 맡았던 기획재정부는 사업성이 없다" "현실에 맞지 않는다"면서 예산을 난도질했다. 재정부는 예산 삭감 근거로 대통령 직속 국가과학기술위원회(국과위) 산하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의 예비타당성 조사 결과를 제시했다.
이 같은 결과에 기획단 설립을 주도했던 최경환 한나라당 의원(전 지경부 장관)은 "미친 짓"이라고 흥분했다. "내년 예산을 90% 이상 줄어든 90억 원으로 깍은 것은 조직을 없애라는 소리다. 노벨상 수상자 등 세계적 석학들의 조언을 토대로 기획단이 9개월 동안 연구한 결과를 단 7명의 국과위 관계자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평가한 건 대학교수가 쓴 논문을 초등학생들이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예산 밀어주기, 나눠먹기 관행을 배경으로 꼽았다.
"평가가 투명하게 이뤄졌다"는 국과위 해명에도 불구하고 이번 예산 심의 결과로 전략기획단은 갈림길에 놓여 있다. 예산이 대폭 삭감돼 당초 목표했던 대형 개발과제를 제대로 진행하기 어려워 졌다. 10년 후 대한민국의 성장 동력을 발굴한다는 당초 취지와 달리 지식경제 R&D 일부만을 맡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민간 전문가의 경륜을 활용하겠다며 민관 합동으로 어렵게 출범시킨 전략기획단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R&D 컨트롤타워라며 거창하게 출범한 전략기획단이 이대로 무력화될 경우 앞으로 어떤 전문가가 국가발전을 위해 몸담겠는가. 전략기획단은 10∼20년을 내다보고 일하자고 만든 조직인데, 근시안적으로 판단해선 과실을 거둘 수가 없다. 정부는 장기적 안목에서 예산심의를 재고할 여지가 없는지 다시 살펴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