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이 1988년에 미국 종합무역법에 의해 통신시장 우선협상대상국으로 지정된 것은 당시로는 사건 그 자체였다. 불공정무역을 이유로 단일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지정됨으로써 무역보복을 앞세운 미국과 협상을 하여야 한다는 부담감도 문제였지만 대한민국의 작은 통신시장을 놓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전자교환기를 국산화함으로써 미국 기업들의 수출이 줄어든 것에 대한 보복성 성격도 있었지만 우리의 시장과 관련 법제도를 어떻게 바꿀지를 본격적으로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
2년 동안의 협상과정을 통해 우리의 시장을 바꾸는 도박을 시도하면서 당시 연구원에서 협상과 법제도 정책을 담당했던 필자는 영국을 주목했다. 서비스를 기준으로 규제의 틀을 만든 미국, 설비를 기준으로 하는 일본 모델에 비해 영국은 서비스와 설비 모두를 기준으로 규제의 틀을 운영하고 있었다.
시장 개방요구는 불가피하게 수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국내 기업과 시장에 돌아갈 피해를 가급적 최소화하겠다는 계산을 담아 영국을 벤치마킹, 보수적 시장 개방과 규제의 틀을 짰다. 현재의 기본통신, 부가통신 등 설비와 서비스를 모두 고려한 통신사업자 구분 법체계가 그때 만들어 졌다.
90년대, WTO 체제를 거치면서 통신시장 개방과 규제에서의 글로벌 스탠다드 채택은 보편화되었다. 반면 '스크린쿼터'로 상징되던 방송시장의 국제적 개방 노력은 실패했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방송, 영상서비스는 '공공성'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특수한 시장으로 바라보았지만 정작 영국은 1996년에 방송법을 개정, 국내외 대기업의 참여 허용 등 자국의 방송시장을 대폭 개방했다.
올 초에 연구원 원장 자격으로 영국을 방문했다. 통상산업부 장관은 우리의 초고속인터넷망 정책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20년 전 필자의 연구 벤치마킹 대상 국가였던 영국이 이제는 우리를 방문해서 공동세미나를 할 수 있냐고 제안하는 것을 듣는 순간, 새삼 우리가 무엇을 가르쳐줄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IT컨트롤 타워논쟁을 계기로 우리가 먼저 꼼꼼히 살펴봐야 할 것은 새로운 자리가 필요한지의 여부가 아니라 'IT강국'의 손익계산서다. 오바마 정부의 초고속인터넷망 대선공약도 대한민국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우리의 초고속인터넷망 보급 현황과 이를 뒷받침하는 정부의 의지와 노력은 선진국이 더 부러워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최고의 기반을 활용, 세계 시장을 끌고 나갈 수 있도록 기업 경쟁력을 어떻게 보완할지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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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내 IT시장 상황은 성숙기를 지나 세계시장을 향한 디딤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글로벌 통신사업자들은 유무선 네트워크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투자는 계속하고 있지만 요금인하 추세에 맞서 수익을 증대시켜야 하는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반면, 방통융합을 완성하기 위해 국내 방송법이 개정되면서 융합을 위한 인프라는 확대되었지만 아직 시장 형성이 진행 중이다.
전통적인 '서비스-콘텐츠-네트워크'의 3개 연결고리 가운데 서비스 영역에서는 규제완화로 인해 정부 역할이 축소되는 것이 추세다. 반면 콘텐츠와 네트워크 분야에서는 정부가 나서고 있지만 정작 콘텐츠는 S/W와 연결되고, 단말기와 결합되어지며 문화콘텐츠, 방송콘텐츠 등으로 세분화되면서 정책대상으로 쉽게 포섭되기는 어려워졌다.
특히 우리의 경우 융합을 이끌고 있는 IT기술이 제품 단위를 넘어 조선, 건설, 의료, 자동차 등의 산업으로 확대되고 '그린IT'라는 이름으로 국가경제를 견인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와 인프라 부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려운 대상들을 어떻게 정책으로 담아 기업과 동반자로서 지속적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는지를 더 고민하여야만 한다.
굳이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예를 들지 않아도 우리의 손익계산서도 삼성과 LG와 같은 하드웨어 파워만 가지고는 진정한 IT강국이 되기 힘들다는 우려의 신호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