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서재]'잠수 한계 시간'…관능적 여배우와 무능한 작가 부부의 살인미수사건

예고된 장마. 물기 가득 찬 공기가 살에 전달하는 찐득한 느낌. 이런 날씨를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친다 해도 '이유 없이 도끼 들고' 설치거나 '목이 돌아가는 아이들'이 나오는 공포영화는 딱 질색이다. 탐험이나 미스터리 추리소설 정도면 안성맞춤일 텐데.
신간을 뒤적이다 육지의 '룰'이 통하지 않는 '잠수'라는 특별한 행위를 소재한 소설 한권이 눈에 들어왔다. 독일에서 가장 주목받는 소설가중 하나라는 율리 체의 '잠수 한계 시간(Nullzeit)'.
과학책인가 싶었던 제목의 이 소설은 미수로 그친 살인사건 이야기다. 관능적인 여배우와 작가는 부부다. 여배우와 12살 차이가 나는 작가(여배우는 그를 노인네로 지칭한다)는 성 불능에, 창작 불능에 고통스러워한다.
사건은 이들이 스페인 섬에 2주간 잠수를 배우러 가면서 시작된다. 부부간 극단적 언어 및 성적 학대, 주인공인 잠수 강사를 향한 여배우의 노골적 유혹.
시작부터 끝까지 '도대체 뭐가 사실이야?' 할 정도로 헷갈린다. 주인공이 겪은 상황과 전혀 다른 여배우의 '일기'가 바로 교차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해안가에서 전라 상태의 여배우의 유혹을 간신히 외면한다. 하지만 여배우의 '일기'에서는 동일 상황에 대한 정 반대의 스토리가 펼쳐지는 식이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건지, 진실게임은 마지막까지 계속된다. 소설 마지막에 다다르면 범인은 분명해지는 듯하다. 그럼에도 저자는 범인이 다른 사람일 수 있다는 장치를 슬쩍 해놓아 마지막까지 혼선을 준다.
미수로 그친 살인사건과 진실게임을 통해 저자가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따로 있다. 주인공은 독일서 도피해온 법학도다. 부유한 집에서 적당한 사회적 지위를 갖추고 살려던 주인공은 위선적인 평가시스템에 질려 스스로 고립된 삶을 택했다.
"서로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일이 나는 아주 싫었다. 그건 중독이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서로에 관해 내린 평가로 이루어진 그물망 속에서 살아가는 삶...(중략) 평가를 내리는 자와 평가를 받는 자가 영원한 전쟁 상태에 있고, 각자 이 두 가지 중 한 역할을 수행한다.(44쪽)"
주인공의 이런 생각은 '어떤 상황에도 개입하지 않는 삶'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독일에서 스페인으로, 육지에서 섬(바다 속)으로, 법학자에서 잠수부로 도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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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삶이란 본디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얽히고설키는 그물망 같은 거다. 위험한 심해에서 죽어가는 이를 살릴 것인지에 대한 판단. 그리고 그 행위는 최선이었다. 주인공은 그 순간 그토록 혐오한 '개입'이 옳았음을 깨닫는다.
"왜 내가 십 사 년 동안 '개입하지 않다'라는 개념을 그토록 매력적이라 여겼는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추한 개념이다"라는 독백에 이르렀을 때(288쪽) 주인공은 깨닫는다. 주인공이 여배우의 남편을 살리는 일에 '개입'하지 않고 육지로 올라갔다 해도 또 다른 개입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작가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주인공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과 동시에 그조차 '한계 시간'이었음을 꼬집는다. 특별한 조치(감압) 없이 최대한 잠수를 할 수 있는 '잠수 한계 시간'처럼 우리들의 현실 도피 시간은 결코 무한하지 않다.
"외면하지 말고, 도망가지 말고 개입하라. 잔인하고 모순투성인 삶일지라도."
명징한 저자의 '주장'이 깔려있지만 소설은 소설이다. 재밌다. 끈적끈적한 무더위를 날릴 수 있는 묘한 긴장감까지 주니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공포영화보다 한 수 위가 분명하다.
소설이 남긴 또 다른 자투리 메시지 하나, 바다 속에 대한 동경이다. "물속에서는 관계가 단순했고, 욕구는 분명했으며, 반응은 단호했다(중략). 생명이 시작된 곳으로 가며 물속에서 부유하고 침묵한다. 언어가 없으면 개념이 없다. 개념이 없으면 논거가 없고, 논거가 없으면 전쟁이 없다. 전쟁이 없으면 공포가 없다.(82쪽)"
주인공이 육지의 지독한 평가시스템으로부터 도피해 선택한 바다 속이기 때문에 가능한 묘사일 수 있다. 하지만 바다 속을 한번이라도 들어가 본 사람이라면 이 문장 앞에서 아! 라는 낮은 감탄사를 뱉을 수밖에 없다.
바다 속은 언어의 위력이 사라진 '수화'의 공간이다. 물안경 속의 눈빛과 손짓만으로 상대의 맘을 읽을 수 있는, 읽어야하는. 아직 바다 속을 못 본 사람은 상상만 하시던지 이 여름, 당장 스노클링이라도 배우러 가시던지.
그런데 여배우 남편을 죽이려던 범인은 진짜 누구일까. 참고로 저자는 법학박사다. 독일 내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평가받는다.
잠수 한계 시간=율리 체 지음, 민음사, 312쪽, 1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