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유를 수백도 이상 가열하지 않고도 휘발유와 나프타 등 석유제품을 분리할 수 있는 신기술이 한국 연구진에서 나왔다.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증류 중심 정유 공정을 대체할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정유·석유화학 업계의 관심이 쏠린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고동연 한국과학기술원(KAIST) 생명화학공학과 교수 연구팀이 원유를 끓이지 않고 값싼 고분자 막만으로 상온에서 정밀하게 걸러 내는 데 성공했다고 25일 밝혔다. HD현대오일뱅크에서 제공한 사우디산 경질유인 아라비안 라이트 원유를 활용하고 과기정통부 지원 사업으로 수행한 이번 연구 성과는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게재됐다.
제1저자인 최지훈·서혁준 KAIST 박사는 "기존 정유 공정이 원유를 350도 이상으로 가열한 뒤 끓는점 차이를 이용해 휘발유·나프타·등유·경유 등을 분리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번 기술은 분리막에서 직접 분리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분리막 표면에 머리카락 두께보다 훨씬 얇은 '선택층'을 반드시 코팅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 연구팀은 분리막에 아무런 코팅을 하지 않은 값싼 다공성 고분자(PAN) 막에 원유를 그대로 흘려보냈다.
그 결과 원유 속 무거운 탄화수소 성분들은 분리막 내부의 미세한 구멍에 자발적으로 흡착되며 새로운 분리 통로를 형성했다. 연구진은 이를 통해 머리카락 굵기의 5만분의 1 수준인 2나노미터(nm) 이하 크기의 정교한 미세 통로를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복합 혼합물인 원유가 분리막과 상호작용하며 스스로 맞춤형 '체'를 완성한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통로를 통해 나프타와 휘발유, 등유 등 가벼운 성분은 빠르게 통과한 반면 무거운 찌꺼기는 대부분 차단됐다. 일반적으로 분리막 표면에 기름 성분이 달라붙는 현상은 성능을 저하시키는 '오염'으로 여겨지지만, 연구팀은 이를 역으로 활용해 선택적 분리를 위한 통로를 만드는 기술로 전환했다.
특히 연구진은 막대한 설비 교체 비용 없이 기존 정유공장의 배관 시스템에 필터 모듈을 추가하는 형태로 이 기술을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점을 장점으로 꼽았다. 연구진은 원유를 분리막으로 1차 처리한 뒤 잔여 성분만 증류탑에서 분리할 경우 기존 정유 공정 대비 에너지 사용량을 31.6%,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37.6% 줄일 수 있다고 밝혔다. 운영비도 36% 절감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를 국내 정유·석유화학 업계에 확대 적용하면 연간 1000만톤의 온실가스를 감축할 수 있으며, 이는 승용차 400만대가 1년 동안 내뿜는 탄소량과 대등한 수준이라는 것이 연구진의 설명이다.
고동연 KAIST 교수는 "이 공정을 다량, 장기간 돌렸을 때 어떻게 될지, 아라비안 라이트가 아닌 다른 원유를 쓸 때 분리막이 어떻게 반응할지가 관건"이라며 "파일럿 단계에서 검증을 잘 하면 3~5년 안에 상용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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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교신저자인 이재우 KAIST 교수는 "향후 국내 정유·석유화학 공정 곳곳에 끼워 넣을 수 있는 대면적 모듈화 기술과 장기 운전 기술을 완성해 100년간 증류가 지배해 온 정유 산업을 분리막 공정으로 전환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과기정통부 김성수 연구개발정책실장은 "이번 성과는 정유 공정의 에너지 소비와 이산화탄소 배출을 동시에 낮춰 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뜻깊은 성과"라며 "앞으로도 기초연구가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로 이어지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