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연구 현장으로 향하는 AI 기업
신약부터 천문학까지 산업 활용 경쟁 본격화

"메일 하나 써줘", "회의록 정리해줘", "에세이를 작성해줘". 생성형 AI가 처음 세상에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AI를 '똑똑한 문장가'로 기억했다. 글을 쓰고 번역하는 역할을 AI에게 맡겼다.
이후 AI는 '개발자'가 됐다. 자연어로 명령을 내리면 알아서 코드를 짜고 개발을 진행하는 바이브코딩이 대세가 됐다. 현실 세계에선 오히려 개발자의 시대가 저물고 '기획'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됐다.
다음은 '과학자'다. 요즘 AI 기업들이 가장 공을 들이는 곳은 바로 실험실이다. 신약을 만들고, 새로운 단백질을 설계하고, 우주의 미지의 신호를 찾는 일이 AI의 새 무대가 되고 있다. AI 산업의 중심축이 '생성'에서 '발견'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상징적인 곳은 구글 딥마인드다. 딥마인드는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AI '알파폴드'로 생명과학의 오랜 난제를 풀어냈다. 이 성과로 데미스 허사비스 딥마인드 CEO와 존 점퍼 연구자는 2024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단백질은 생명 활동의 기본 부품이다. 어떤 모양으로 접히느냐에 따라 기능이 달라진다. 구조를 알면 질병의 원인을 이해하고, 신약을 설계하는 길도 열린다. 문제는 경우의 수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사람이 하나씩 확인하기엔 사실상 불가능하다.
AI는 이 지점에서 힘을 발휘했다. 모든 길을 다 가보는 대신, 가능성이 높은 길부터 좁혀갔다. 과학자가 수년 동안 헤맬 수 있는 길을 AI가 먼저 표시해준 셈이다.
허사비스가 AI를 "과학을 위한 궁극의 도구"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AI는 사람 대신 논문을 쓰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탐색을 대신하며 새로운 발견의 문을 여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딥마인드에서 분사한 AI 신약 개발 기업 아이소모픽랩스는 AI로 설계한 신약 후보를 임상 단계로 끌어올리고 있다. 목표는 거창하다. 모든 질병을 해결하겠다는 것. 허황된 구호처럼 들리지만, 투자자들은 이미 반응하고 있다. 올해 대규모 자금 조달에 성공하며 AI 신약 개발이 연구실의 실험을 넘어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앤트로픽도 실험실로 들어갔다. 최근 공개한 '클로드 사이언스'는 일반 사무직용 챗봇이 아닌, 연구자를 겨냥한 AI 플랫폼이다. 논문을 요약하는 수준을 넘어 실험 데이터 분석, 계산 작업, 연구 흐름 관리까지 돕는 방향이다.
독자들의 PICK!
알파폴드 개발을 이끌며 노벨 화학상을 받은 존 점퍼는 최근 구글 딥마인드를 떠나 앤트로픽으로 자리를 옮겼다. AI 기업들이 이제는 LLM 개발자뿐 아니라 노벨상급 과학자까지 끌어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왜 AI 기업들은 갑자기 실험실로 향할까. 과학에는 너무 많은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신약 하나를 찾으려면 수억, 수십억 개의 후보 물질을 검토해야 한다. 새로운 배터리 소재를 찾는 일도 마찬가지다. 반도체 공정 조건을 최적화하거나, 우주망원경이 보내온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는 일도 인간이 손으로 하나씩 보기엔 너무 크다.
AI는 이 거대한 가능성의 바다에서 지도를 그린다. 어디부터 실험해야 하는지, 어떤 후보가 더 유망한지, 실패 가능성이 큰 조합은 무엇인지 먼저 알려준다. 과학자를 대체한다기보다 과학자의 시간을 가장 필요한 곳에 쓰게 만든다.
한국은 이미 바이오, 배터리, 반도체, 소재, 로봇 같은 제조 기반 산업을 갖고 있다. 그러나 아직 AI를 챗봇이나 업무 자동화 도구로만 보는 시각이 강하다. 문서 요약과 상담 자동화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다음 단계의 승부를 만들기 어렵다.
AI가 신약 후보를 찾고, 배터리 소재 조합을 줄이고, 반도체 공정 데이터를 분석하고, 로봇의 움직임을 학습하는 순간 생산성의 단위가 달라진다. AI는 더 이상 사무실 책상 위의 도구가 아니라 연구소와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 기술이 된다.
검색엔진은 이미 존재하는 정보를 찾아냈다. 챗봇은 그 정보를 사람이 읽기 쉬운 문장으로 바꿨다. 바이브코딩은 '글'과 '개발'의 경계를 허물었다. 이제 AI는 과학자가 돼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지식을 찾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