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응급실 의사 조롱…블랙리스트 작성자, 잡히자마자 피해자에 합의 요청

[단독]응급실 의사 조롱…블랙리스트 작성자, 잡히자마자 피해자에 합의 요청

박정렬 기자
2024.12.16 14:13
의료계 블랙리스트 '감사한 의사 명단' 사이트. /사진=웹페이지 캡처
의료계 블랙리스트 '감사한 의사 명단' 사이트. /사진=웹페이지 캡처

복귀 전공의, 병원에서 일하는 전임의, 학교로 돌아간 의대생 등 3000여명의 실명과 학번, 근무지 등이 담긴 의료계 블랙리스트 '감사한 의사'를 제작·유포한 사직 전공의 류모씨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합의를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16일 확인됐다.

머니투데이 취재에 따르면 류씨는 최근 변호사를 통해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른 피해자들에게 민사·형사상 합의를 조건으로 반성문을 제출하고 '사죄의 변'을 전하고 싶다며 접촉하고 있다. 류씨는 지난 9월 붙잡힌 사직 전공의 정모씨에 이어 '의료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구속된 두 번째 피의자다. 재판을 시작하기 전 최대한 합의 의사를 밝혀 재판부에 선처를 호소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서울 소재 '빅5 병원'의 사직 전공의인 류씨는 지난 8~9월 집단 사직과 휴학에 동참하지 않은 전공의, 의대생 등 2900여명의 명단을 수집해 해외사이트 '페이스트빈' 등에 게시한 혐의(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명예훼손 등)로 지난 3일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의료계 집단행동에 동참하지 않은 의사·의대생의 신상 정보가 담긴 블랙리스트 '감사한 의사'를 유포한 사직 전공의 정 모씨가 2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경찰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사진=(서울=뉴스1) 장수영 기자
의료계 집단행동에 동참하지 않은 의사·의대생의 신상 정보가 담긴 블랙리스트 '감사한 의사'를 유포한 사직 전공의 정 모씨가 20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경찰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사진=(서울=뉴스1) 장수영 기자

블랙리스트는 초기 실명과 학번, 근무지 등이 공유됐던 데서 수 차례 업데이트되며 의사면허, 전화번호, 이메일, 인스타그램과 카카오톡 아이디까지 방대한 개인정보가 포함돼 피해자들에게 2차, 3차 피해를 줬다. "발기부전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탈모가 왔다고 함", "미인계로 뽑혀 교수님과 연애", "외상 환자 방치해 숨넘어갈 뻔" 등 확인되지 않는 정보를 마치 '사이버 렉카'처럼 퍼트렸다. 명단에 올라간 전공의, 전임의 등에게 사직 후 이를 인증하면 블랙리스트에서 빼주겠다며 '협박'하기도 했다. 동료 의사들에게 조리돌림당하는 것을 우려해 실제 사직한 의사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추석쯤 업데이트된 블랙리스트에는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를 특정해 '부역자'라 지칭하면서 "민족의 대명절 추석, 의료대란을 막기 위해 힘써주시는 분들께 감사와 응원을 드린다"고 비꼬기도 했다. 의료공백으로 '응급실 뺑뺑이'에 대한 불안이 커지는 상황에 환자가 증가하는 명절을 앞두고 나온 '응급실 부역' 명단은 전 국민의 공분을 샀다.

당시 익명을 요청한 의대생 A씨는 머니투데이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의대생, 전공의가 한두 명이 아닌데 다 블랙리스트 때문에 못 돌아가고 있다"며 "응급실 파행을 막기 위해 열심히 근무하는 의사를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게 인간이 할 짓이냐"며 분개했다.

임현택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21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성북경찰서에서 '의료계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로 구속된 전공의 면회를 마친 후 입장을 밝히고 있다./사진=[서울=뉴시스] 추상철 기자
임현택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21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성북경찰서에서 '의료계 블랙리스트' 작성 혐의로 구속된 전공의 면회를 마친 후 입장을 밝히고 있다./사진=[서울=뉴시스] 추상철 기자

그러나, 의료계에서는 앞서 구속된 정씨에 이어 류씨를 위한 후원 모금 인증 릴레이가 또다시 진행되고 있어 "범법 행위를 두둔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폐쇄형 의사 커뮤니티인 '메디스태프'를 중심으로 블랙리스트 작성자들을 독립운동가·영웅 등에 빗대며 "이것밖에 할 게 없는 죄인 선배" "돈벼락 맞는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 등 우상화하고, 공개된 계좌번호에 수만~수백만원의 후원 사실을 '인증'하는 상황이다.

메디스태프 등 의사 커뮤니티에서는 아직도 복귀 의사에 대한 신상정보가 무차별 공유되며 조롱하고 비난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이달 초 자신을 서울 한 병원에서 근무한다고 밝힌 의사 B씨는 자신의 블로그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의사들 커뮤니티에서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며 피해를 호소했다. B씨가 공개한 메디스태프의 게시글과 댓글을 보면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는데 맞나? ○○에서 인턴하고, 학교는 ○○. 동료 등에 칼 꽂고 신나? 숨어서 벌벌 기면서 하지 말고 떳떳하게 해", "자살 추천한다. 동료 등에 칼 꽂는 놈"이라며 비난하고 모욕하는 글이 다수 올라와 있다. 심지어 "애미 XX, 애비 XX", "자식 교육 잘못해서 죄송합니다. 더 두들겨 팼어야 하는데" 등 청원인의 부모에까지 입에 담기 힘든 욕설로 비하하기도 했다.

서울의 한 수련병원에서 일반의로 근무하고 있다는 의사가 이달 초 다수의 온라인 커뮤니티와 자신의 블로그에 '의사 커뮤니티에서 벌어지는 집단 린치를 폭로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피해 사실을 공개했다./사진=웹페이지 캡처
서울의 한 수련병원에서 일반의로 근무하고 있다는 의사가 이달 초 다수의 온라인 커뮤니티와 자신의 블로그에 '의사 커뮤니티에서 벌어지는 집단 린치를 폭로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피해 사실을 공개했다./사진=웹페이지 캡처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전임의 C씨는 "전공의나 의대생의 사직과 휴학은 집단행동이 아니고 개별적인 선택이라면서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조롱하는 명백한 집단행동이자 불법행위를 방조·장려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또 다른 피해 의사 D씨는 "의료계 블랙리스트도 메디스태프와 같은 폐쇄형 커뮤니티에서 시작했다. 의사 커뮤니티는 복귀 의사 등에 비방 글이 올라오면 오히려 피해자를 강제 탈퇴시켜 증거 수집을 막는다"며 "극단적인 수준의 폭언과 가족에 대한 모욕, 허위사실 유포 등이 비일비재하게 이뤄지지만 마땅히 손 쓸 방법이 없다"고 울분을 터트렸다.

이어 "명백한 범법 행위에 대해 커뮤니티 운영진이 제재를 가하지 않는 것도, 대한의사협회 등 의사 내부적으로도 아무런 자정작용이 이뤄지지 않는 것도 너무 화가 난다"며 "미복귀 의료인을 '처단'한다는 포고령에는 반발하면서 의료 정책과 무관한 복귀 의사를 '처단'하는 글에는 왜 아무도 나서지 않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김윤·위성곤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보건복지부와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종합하면 경찰은 '의료계 블랙리스트' 등과 유사한 총 36건의 수사의뢰서를 접수해 이달 초까지 55명을 조사했다. 이 중 구속과 불구속을 합쳐 총 43명을 스토킹처벌법 위반 등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의료계 블랙리스트는 지난 9월 이후 업데이트가 중지됐지만 아직 폐쇄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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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렬 기자

머니투데이에서 의학 제약 바이오 분야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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