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프로스 사태에 세계 금융시장 차분...리먼사태 직전 '오싹한 고요'와 닮아
키프로스 사태로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재정위기가 다시 고조됐지만, 세계 금융시장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있다. 폭풍 전의 고요일까, 아니면 사태 해결에 대한 확신일까.
22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유럽 주요 증시를 반영하는 FTSE유로퍼스트300지수는 이날까지 한 주간 1% 하락하는 데 그쳤다. 변동성지수 역시 큰 움직임이 없었고,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주변국 국채 수익률도 줄곧 지난해 수준을 밑돌았다.
사이먼 데릭 뱅크오브뉴욕멜론 외환 투자전략가는 "시장 움직임이 별로 없다는 데 놀랐다"며 "지난 2008년 리먼브라더스가 무너지기 전에 있었던 오싹한 고요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스테판 디오 UBS 자산배분 부문 글로벌 대표는 "많은 눈송이가 쌓인 뒤에는 산 정상에 눈이 쌓이고 어느 시점에서는 눈송이 하나가 눈사태를 일으킬 수 있다"고 거들었다.
FT는 금융시장이 잠잠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키프로스 사태의 파장이 유럽 대륙까지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꼽았다. 그도 그럴 것이 키프로스가 세계 채권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년 전 0.01%밖에 안 됐다. 그 사이 키프로스는 신용등급이 강등돼 채권시장에서 퇴출됐다. 경제 규모는 유로존의 0.2%에 불과하다.
릭 라이더 블랙록 채권 부문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이날 뉴욕 조찬 회견에서 "미국은 지금부터 점심때까지 키프로스의 한 해 GDP(국내총생산)를 창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FT는 유로존 주변국에서 외국인 자본이 이미 빠질 만큼 빠졌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이탈리아 총선 결과가 불투명해지면서 스페인과 이탈리아 채권시장에서 급격한 매도가 진행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매수세가 다시 일었다. 덕분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이탈리아 총선 이전 수준으로 떨어졌다.
수키 만 소시에테제네랄 신용전략 부문 대표는 이런 변화가 사태 해결에 대한 확신을 반영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 2, 3년간 모든 위기가 정책 대응으로 가라앉았기 때문에 시장에 관망세가 일고 있다"고 말했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FRB)와 유럽중앙은행(ECB) 등 주요 중앙은행들이 경기부양 기조를 확인한 것도 확신의 근거가 됐다. 줄리언 캘로우 바클레이스 이코노미스트는 "중앙은행들의 움직임이 키프로스 사태에 시장이 무관심해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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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준은 지난 20일 제로(0)금리와 매월 850억달러어치의 채권을 매입하는 양적완화 등 기존 부양책을 고수하기로 했다. 키프로스 의회는 그 전날 은행 예금 과세를 핵심으로 하는 구제금융안을 거부했다.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면 키프로스 사태의 파장이 시장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일례로 지난 2010년 10월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향후 구제금융과 관련해 민간채권자 손실분담 원칙에 합의했지만, 채권시장에서 파장이 나타난 것은 2개월이 지나서였다.
아타나시오스 오르파니데스 전 키프로스 중앙은행 총재는 "(사르코지와 메르켈의 합의가)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깨닫는 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은행 예금 과세안에 따른 신뢰 붕괴는 아직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키프로스 사태로 유로존 붕괴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도 보통일이 아니다. 유로존 붕괴를 막기 위해 뭐든 다 하겠다는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의 공언이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ECB는 지난 21일 키프로스에 오는 25일까지 유럽연합(EU), 국제통화기금(IMF)과 구제금융안에 합의하지 않으면 은행권에 대한 긴급 자금 지원(ELA)을 끊겠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지원 중단으로 키프로스 은행권이 붕괴하면 결국 키프로스가 유로존을 이탈해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데릭은 "아무리 작은 나라라도 유로존을 일단 이탈하면, 유로존 이탈(붕괴)이 가능하다는 게 입증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최대 채권펀드 운용사인 핌코의 엘 에리언 CEO(최고경영자)는 "투자자들이 ECB가 개입해 지원해 줄 것이라는 기대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며 "정치·사회적 긴장이 고조될 때 중앙은행 효과가 지속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는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