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중간선거][기획] 표를 사는 제국 : 미국 선거자금 보고서①
격전지 유권자 1명에게 수십 번 뿌려지는 정치 광고
컨설팅·데이터분석·CTV·소셜미디어 '선거 특수'에 환호
후보·정당·슈퍼팩 자금, 거대 미디어·마케팅 생태계로 유입

미국 중간선거의 대표 격전지 텍사스주 댈러스에 거주하는 직장인 피터(42)는 요즘 '정치 광고의 포로'가 된 기분이다. 오는 3일(현지시간) 중간선거일을 앞두고 아침 출근길 라디오에서 후보 비판 광고를 듣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 밤에 잠들 때까지 정치 메시지의 폭격을 맞는다. 피터는 "퇴근 후 스트리밍 앱으로 영화를 볼 때나 소셜미디어를 훑어볼 때도 10분 간격으로 상대 후보를 공격하는 선거 광고가 나온다"고 말했다.
광고 수위도 거침없다. 오하이오주 주지사 선거에서는 민주당 에이미 액턴 후보와 의절한 친모가 딸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는 광고를 공화당 비벡 라마스와미 후보가 내보냈다. 가족관계까지 선거 공방의 소재로 끌어들인 네거티브 광고다.
선거전이 과열될수록 정치 광고에 쏟아지는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선거 자체가 정당과 후보의 정책 대결을 넘어 거대한 정치 마케팅 산업으로 진화하는 양상이다. 유권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 위해 수십억달러가 움직이고 그 돈은 정치 컨설팅 업체와 데이터 기업, 광고 대행사, 방송사와 디지털 플랫폼으로 흘러든다.
112억달러…대선마저 넘어선 역대 최대 자금전

시장조사업체 애드임팩트에 따르면 올해 미국 중간선거 정치 광고 집행 및 예약금액은 10월28일 기준 112억1000만달러(약 14조9500억원)로 2년 전 대선 당시(112억달러)를 이미 넘어섰다. 중간선거 광고비가 대선을 넘어서 역대 최대를 기록한 이례적인 현상이다. 선거일까지 남은 기간을 고려하면 최종 광고비는 더 늘어날 수 있다.
광고비는 선거 종류를 가리지 않고 불었다. 각 당의 사활이 걸린 연방 상원 선거 광고에만 32억달러(약 4조2700억원)가 집행됐다. 하원 선거에는 23억달러, 주지사 선거에는 26억달러가 투입됐다. 의회 다수당 지위와 주정부 권력을 둘러싼 경쟁이 동시에 치열해지면서 선거 광고 시장도 전례 없는 규모로 커졌다.
미국 연방선거위원회에 집계된 상·하원 후보자들의 직접 지출액만 이미 19억달러(2조5300억원)에 달한다. 선거자금을 무제한으로 모을 수 있는 외곽 후원조직 '슈퍼팩'과 기업·산업 단체의 집행분까지 합산하면 선거판 전체에 흐르는 돈의 규모는 가늠하기 어렵다.
글로벌 리스크 컨설팅업체 D&A어드바이저리의 장성관 미국전략실장은 "과거에는 중간선거가 대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규모로 치러졌지만 요즘은 상원 의석 하나가 의회 전체의 주도권을 결정짓다 보니 대선판을 방불케 하는 자금전이 벌어진다"며 "선거가 이미 정치의 영역을 넘어 수십억달러대 마케팅 예산이 집행되는 산업이 됐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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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마이닝·AI 광고제작…거대 선거 생태계 가동

선거판에 쏟아지는 자금은 정교하게 분업화된 선거산업 생태계 전반으로 흘러든다. 후보와 정당의 광고 전략을 설계하는 정치 컨설팅 업체와 데이터 기업은 유권자의 연령과 성별, 거주 지역 같은 기본 정보뿐 아니라 투표 이력과 정치 성향, 소비 패턴 등을 분석해 광고 메시지와 노출 대상을 정한다. 불특정 다수에게 같은 광고를 내보내는 방식에서 벗어나 유권자 집단별로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정치 데이터 컨설팅업체 아리스토텔의 한 데이터 미디어 전략가는 "불특정 다수에게 TV 광고를 노출하는 선거의 시대는 지난 지 오래"라며 "유권자가 어떤 쇼핑몰을 이용하고 어떤 OTT 콘텐츠를 즐겨보는지까지 파악해 핀포인트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가장 많은 기술과 자금이 투입된다"고 전했다. 펜실베이니아의 20대 대학생에게는 전기요금이나 에너지 정책을 겨냥한 광고를, 메인주의 고령층 가구에는 주거비와 복지 정책을 강조하는 광고를 노출하는 식이다.
올해 중간선거에서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발빠른 광고 제작도 주목받는다. 상대 후보가 아침 뉴스에서 한 발언을 분석한 뒤 AI 기술로 영상과 음성, 광고 문안을 조합해 몇시간 안에 반박 광고를 제작하는 식이다. 광고 제작에 걸리는 시간을 줄이고 선거 쟁점의 변화에 맞춰 메시지를 빠르게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AI가 선거 마케팅의 속도와 효율을 높이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TV부터 CTV·빅테크까지…유권자 화면 점령한 돈

이렇게 세워진 전략과 기술 위에서 선거자금이 최종 집결하는 곳은 미디어와 광고 플랫폼이다. 방송 TV가 전체 광고 예산의 48%(56억달러)를, 인터넷에 연결된 TV에서 스트리밍 콘텐츠를 시청할 때 노출되는 커넥티드TV(CTV) 광고는 23%(27억달러)를 차지할 것으로 애드임팩트는 추산했다. 페이스북과 구글 등 디지털 광고에도 14%(16억달러)가 투입될 것으로 추산됐다.
광고비 경쟁은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운 격전지에서 특히 치열하다. 텍사스주 상원 선거의 광고 집행액과 예약액은 5억5760만달러(약 7400억원)에 달한다. 오하이오주 상원 선거도 5억달러를 넘어섰다. 두 선거 모두 비(非)대통령 선거 가운데 역대 최고 수준의 광고비가 투입된 사례다. 미시간, 아이오와, 메인, 캔자스, 알래스카 등 다른 경합주에서도 의석 하나를 놓고 수억달러가 오간다.
선거 막판에는 광고비가 더 빠르게 불어나고 있다. 워싱턴이그재미너에 따르면 선거 마지막 주 상·하원 상위 15개 선거에만 4억500만달러 이상의 광고비가 투입될 예정이다. 투표일이 가까워질수록 유권자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후보와 외부 단체의 광고 경쟁이 거세지는 것이다.
2022년 미국정치학회 연구에 따르면 TV 광고에 200만달러(약 27억원)를 추가 투입할 경우 1만표를 움직이는 효과를 내는 것으로 분석됐다. 1~2%포인트 차이로 승패가 갈리는 경합주에서 '돈의 힘'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트레버 포터 캠페인리걸센터 대표는 "후보와 정당, 후원회가 끌어모은 천문학적인 돈은 결국 마케팅 산업을 거쳐 유권자의 일상 속으로 침투한다"며 "미국 선거에서 자금 동원력이 정책 대결 못지않은 변수로 꼽히는 배경"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