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재벌 정책의 중심축이 되는 출자총액 제한제도를 폐지할 것인지, 폐지한다면 그 대안이 무엇인지를 놓고 재계, 공정거래위원회, 정부, 정치권, 시민단체 간의 논란이 뜨겁게 진행되고 있다.
흔히 출총제라 불리는 출자총액제한제도는 자산 규모 6조원 이상의 기업집단에 속하는 회사들이 소유하고 있는 국내 다른 회사 주식의 합계액이 당해 회사 순자산의 25%를 초과할 수 없도록 규정한 제도이다. 이 제도는 재벌이 계열사 간 출자를 통해 적은 자본으로 계열사를 무분별하게 늘리는 행위를 막음으로서 재벌에게 경제력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고 재벌 오너가 적은 지분으로 많은 계열사를 지배하는 왜곡된 소유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이다.
출총제가 재벌의 투자를 제한함으로써 기업의 성장과 경제발전, 고용창출에 장애가 되며 출총제가 폐지되면 17조의 투자를 시행하겠다는 재계의 주장에 정부와 정치권 일각이 동조하고 있다. 과연 재벌과 관련된 문제는 해결되었고 출총제는 투자를 막는 장애물일 뿐일까?
우선 출총제는 다양한 예외 규정을 지니고 있어 정보통신과 생명공학, 대체에너지, 환경산업분야 등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필요한 산업, 민영화되는 공기업 인수를 위한 출자, 사회간접자본(SOC) 민간투자회사에 대한 투자 등에 대해서는 출총제에 상관없이 투자가 가능하다. 이러한 예외 규정들 때문에 일부에서는 출총제의 실효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출총제는 근본적으로 내부자본을 이용해 계열사에 대해 과도한 출자를 하는 것을 제한하는 제도이다. 만약 수익성 전망이 밝은 사업이 있을 경우 여유 자금을 지닌 기업의 한 사업부문으로 그 사업을 시행한다면 이는 계열사에 대한 출자가 아니므로 출총제 적용대상이 아니다. 사업자금 역시 차입이나 주식 발행을 통해 외부에서 조달한다면 출총제에 상관없이 어떤 투자도 가능하다.
요즘과 같이 금리도 낮고 주가도 사상 최고 수준을 유지하는 자본시장 상황을 고려할 때 이와 같은 외부자금 조달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만약 재계의 주장처럼 17조원의 투자를 출총제 때문에 유보하고 있다면 이는 출총제 폐지를 볼모로 기업가치 훼손을 감수하는 자해행위로 밖에 볼 수 없다.
이와 같은 재계의 주장에 동조하는 정부와 정치권 역시 우리나라 경제의 저성장, 실업 문제가 단순히 재벌이 투자를 늘려서 해결된다고 믿는다면 이는 우리나라 경제 전반의 구조적인 문제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재계는 외환위기 이후 대규모의 구조조정을 통해 많은 계열사들이 정리되었고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경영투명성과 시장의 감시장치가 크게 강화되어 재벌의 경제력 집중과 소유권 왜곡에 따른 문제는 많이 해결되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출총제를 이번 기회에 폐지하고 대안으로 논의되는 순환출자 해소도 시행하지 않으며, 나아가 적대적 인수·합병으로부터 오너일가의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해 차등의결권, 황금주 등의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경영권 상속을 쉽게 하기 위해 상속세의 완화 내지는 폐지 역시 주문하고 있다.
이러한 재계의 요구는 단순히 정부의 규제로 경영을 하는데 어렵다는 불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출총제나 대안으로 제시되는 순환출자 해소 등이 결국 오너 일가의 경영권 상속에 큰 장애가 되는데 더욱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외환위기 과정에서 계열사 간 복잡한 순환·상호출자 고리를 통해 기업집단 내 한 계열사의 문제가 다른 계열사로 파급됨으로써 기업집단 전체의 동반 부실화를 초래하고 종국적으로는 경제 전체에까지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음을 경험했다.
그렇다면 재계가 주장하듯 과연 우리 경제의 운명을 이들 재벌 일가의 손에 맡겨도 안심할 수 있을 정도로 재벌과 관련된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삼성의 편법증여, LG석유화학 주식 저가 인도, 두산 형제간의 분쟁, 현대자동차 비자금 등 재벌과 관련하여 끊임없이 발생하는 문제들은 적어도 필자에게는 아직 그 시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