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시계 스타트업 아이디제네브, '명품' 정체성 재정립…"재활용 강철은 스위스의 금"

공장에서 버려진 강철로 만든 시계 값이 최소 500만원이라면 판매가 될까.
폐강철, 포도 껍질 같은 버려진 소재로 한정판 명품시계를 만들어 파는 기업이 있다. 2020년 크라우드펀딩에서 출발한 스위스 스타트업 아이디제네브(IDGeneve) 이야기다. 아이디제네브는 값비싼 보석만이 명품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만드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어떤 가치를 담았느냐에 따라 재활용 소재로 만든 시계도 명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아이디제네브 시계는 스위스 공장들에서 나오는 폐강철을 제련해 만든 케이스에 내부 부품을 넣어 완성한다. 스트랩은 이탈리안 와인 공장에서 나온 포도 껍질과 줄기를 활용해 만든다.
최초 모델 서큘러원부터, 태양광으로 제련한 '솔라 스틸'을 사용한 서큘러S, 풍력발전기 터빈 제조 과정에서 나온 폐탄소섬유를 재활용한 서큘러C, 화석연료와 환경오염 우려가 있는 약품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서큘러에코 등 계속해서 신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서큘러S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발자국은 업계 표준의 165분의 1에 불과하다. 서큘러C의 경우 잠깐 가열하는 것만으로도 손상 부위를 원상 복구할 수 있는 자가 치유 기능을 지녔다.
모델명 서큘러(Circular)는 자원을 최대한 오래 사용하고 폐기물을 최소화한다는 순환경제(Circular economy)를 가리킨다. 시계 상자는 영국 스타트업 노플라(Nopla)가 제작한 것으로, 4~6주 뒤 퇴비로 만들 수 있다. 아이디제네브 시계 가격대는 500만~1500만원이다. 스위스 명품 시계 시장 기준으로 중간층에 해당한다.

아이디제네브 창업자 니콜라 프뢰디거와 세드릭 뮐하우저는 네 살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다. 어릴 적부터 시계에 관심이 많았던 두 사람은 열네 살쯤 "언젠가 우리만의 시계를 만들자"는 약속을 했다. 이후 뮐하우저는 시계공의 길을 걸었고 프뢰디거는 로잔호텔경영대학 진학 후 코카콜라 스위스법인에 입사했다. 길이 잠시 갈렸지만 프뢰디거의 취미는 여전히 시계였다.
프뢰디거가 진로를 바꾼 것은 2019년 회사에서 순환경제 교육을 이수하면서다. "생산에서 서비스, 마케팅까지 지속가능한 사업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순환경제"라는 확신을 얻은 그는 사표를 내고 친구 뮐하우저를 찾아갔다. 우리만의 시계를 만들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산업 디자이너 싱갈 데페리까지 세 사람은 명품을 새롭게 정의한다는 방향성을 갖고 아이디제네브를 창업했다. 아이디는 정체성(Identity)의 앞글자에서 따온 것으로, 신비로움을 앞세운 기존 명품과 달리 투명성을 정체성으로 삼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이들은 2020년 12월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31만5000스위스프랑(5억2300만원)을 모았고 서큘러원 제품 146개를 선주문받았다.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2023년 할리우드 스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투자를 유치하면서다. 프뢰디거는 2021년 11월 뉴욕타임스(NYT) 인터뷰에서 "디캐프리오는 기후변화 문제의 진정한 리더"리며 "3년 안에 그를 투자자로 맞이하고 싶다"고 말했다. 디캐프리오는 2014년 유엔 기후변화 평화 대사로 활동하고 직접 기후변화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등 환경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이후 프뢰디거는 계속해서 디캐프리오 측에 접촉을 시도했고, 디캐프리오는 2023년 10월 아이디제네브 시드 펀딩에 투자자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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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아이디제네브는 연 300~500개 시계를 한정 생산한다. 빠른 확장을 추구하는 일반 스타트업과 달리 스위스 명품 시계 콘셉트를 지키기 위해 소량 주문 생산 방식을 고수한다. 고객이 다 쓴 시계를 다시 사들여 정비한 뒤 다시 상품으로 내놓는 캐시백 제도도 운영 중이다. 프뢰디거는 포브스 인터뷰에서 "재활용 강철은 스위스의 새로운 금"이라며 "금 시계, 다이아몬드 주얼리를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 말고 새로운 이야기를 제시하고 싶다. 우리가 재료를 수집하고 가공하는 방식이 새로운 명품의 정체성"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