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21년 공연기획의 달인 '정동혁 예술의전당 예술사업본부장'

"저는 클래식음악의 매력과 가치가 얼마나 큰지 알리기 위해 제 21년을 바쳤습니다. 예술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고등학교 땐 클래식음악을 절대 안 듣겠다고 했던 제가 말입니다."
1992년 코스모스 대학졸업을 앞둔 스물다섯 살의 청년. 자신의 아이디어로 무언가를 생산해 내며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직업을 꿈꿨던 그는 마침 예술의전당(이하 전당) 클래식공연기획자 모집공고를 보게 됐다. 당시만 해도 낯설었던 공연기획자가 일종의 PD라는 말에 덜컥 지원했고, 그 후 순수문화예술 분야의 저변확대를 위해 고군분투한 세월이 꼬박 21년 흘렸다.
올해 25주년을 맞은 전당의 역사와 젊은 시절을 오롯이 함께 한 주인공은 바로 정동혁 예술사업본부장(46)이다. 공채 3기로 입사해 역대 전당 사장 14명 중에 12명을 도와 함께 일했고, 음악·공연·전시 등 예술사업의 총 책임자 자리까지 올랐다. '교향악축제' '11시 콘서트' '토요콘서트' '청소년음악회' 등 대표적인 공연프로그램이 모두 그의 손을 거친 작품들이다.
그런 정 본부장이 전당을 떠난다는 소식에 그를 찾았다.
"남들보다 조금 빨리 올라왔으니 먼저 내려가야 또 다른 사람들이 올라오겠지요.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도 있잖아요. 제 인생모토입니다. 만 21년간 제가 할 수 있었던 것과 하고 싶었던 것을 충분히 하지 않았겠어요? 허허"
언제 봐도 유쾌하고 자신감 넘치는 그를 지금껏 지탱해준 힘은 무엇일까. 클래식음악 전공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관객들의 마음에 쏙 와 닿는 참신한 기획들을 할 수 있었을까.
"저, 클래식음악 몰랐어요.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죠. 연주자들을 만나서 고충을 듣다보니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함께 머리 맞대고 기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연주자들은 흥이 나서 열심히 했고, 프로그램의 질이 높아질 수밖에요. 관객들의 호응은 말할 것도 없었죠."
기획의 출발은 '사람'에 대한 진심어린 관심이었다. 정 본부장은 누굴 만나면 '저 사람한테 뭘 해줄까?'를 항상 고민한다. 누군가 잘 안 풀리는 일에 대해 털어놓으면 "그거 제가 알아봐드릴까요?" "누구 소개해드려요?"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그렇게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으로 공연을 기획했고, 공연장을 운영했다. 늘 주변에 사람이 넘치는 그를 두고 공연계에서는 "10분이면 교향악단 하나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고 농담을 할 정도다.
정 본부장이 지난 20년 넘게 중요하게 여겼던 다른 한 가지는 '공연장의 역할'이다. 민간 기획사들과 공공극장은 분명히 역할분담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민간부분을 활성화시켜야만 공연장을 제대로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며 "전당은 기획사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을 더 큰 틀에서 바라보고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자들의 PICK!
예컨대 우선대관제도를 통해 기획사들이 해외 유명 연주단체의 공연을 유치할 때 좋은 공연장을 가지고 협의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했다. 훌륭한 공연이 전당 무대에 오르면 기획사와 공연장의 위상이 함께 올라가고, 결국 공연예술계 저변이 확대된다는 생각에서다.
전당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된 '교향악축제'도 기획사가 국내 음악가들만으로 콘서트를 기획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11시 콘서트'나 '토요콘서트' 등은 낮은 티켓가격으로 질 높은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클래식음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였다.
정 본부장은 "사실 금전적으로야 전석 매진이 되어도 적자를 보는 프로그램이지만, 기업의 협찬을 끌어내면서 꾸준히 질적 향상을 도모했다"며 "이것은 민간에서 하기 힘든 공공극장의 몫"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제 부산, 광주 등 광역도시를 중심으로 지방에서도 공연계 저변을 넓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과 지방의 양극화가 심한 점을 지적했다.
"25년 된 교향악축제도 초반엔 없애자는 의견이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우겨서 다듬고 변화시켰죠. 모든 프로그램은 10년, 20년 후의 비전을 가지고 만들어서 완성도를 높여야 합니다. 예술의전당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관객이 많았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선 집을 지어놓고 오라고 해야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아예 짓지 않으면 집은 영영 지을 수 없잖아요."
정 본부장은 클래식음악을 비롯한 순수예술계는 더 발전할 것이고 관객도 늘어날 거라 확신했다. 해외 연주단체에 열광하는 관객 수는 줄어든 반면, 국내 연주단체에 대한 관심은 늘고 있고, 티켓 값이 2만~5만원 하는 공연에 관객이 는다는 것은 문화향유에 대한 대중의 욕구가 분명히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가 꾸준히 강조하는 또 한 가지는 바로 '대중의 클래식화'다.
"저는 '클래식의 대중화'는 잘못된 말인 것 같아요. '대중의 클래식화'는 클래식음악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여건이 된 사람들에게 클래식음악이 어렵지 않고 매력적이라는 것을 전해주는 것이죠. 공연을 기획할 땐 이 생각을 바탕으로 합니다."
문득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의 피터 겔브 단장(60)이 떠올랐다. 시즌 오프닝 공연을 전광판을 통해 무료 생중계하고, 전 세계 64개국 1900개 영화관에 오페라 실황영상을 싼값에 배급하며 오페라를 대중의 품에 안겨준 장본인이다.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는 아이디어와 포기를 모르는 추진력이 결국 관객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메트에 겔브 단장이 있다면 전당엔 정동혁 본부장이 그 역할을 했던 게 아닐까.
문화와 예술, 사람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그의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하다. 그는 문화예술과 기업의 상호관계에 대해 관심이 크다. 기업의 문화예술 활용 방안에 대한 성공적인 모델을 제시해 더 많은 기업들이 문화예술에 관심을 갖게 하고 싶단다.
27일 오전 10시30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내 무궁화홀에서 정 본부장의 퇴임식이 열린다. 정 본부장의 다음 명함이 무엇이 될지는 아직 미정이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여태 보지 못했던 기획력이 번뜩이는 공연이나 행사가 열리면 그가 떠오를 것만 같다.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대중들의 가슴 속에 순수예술만이 줄 수 있는 진한 감동을 남겨준 그는 이런 말을 했다.
"흔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그 자리를 만드는 것이죠."
앞으로 그가 만들어갈 새로운 영역과 자리가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