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은 '나의 용서'가 아닌 '너의 존중'의 의미

관용은 '나의 용서'가 아닌 '너의 존중'의 의미

김고금평 기자
2014.09.03 10:11

[BOOK] '관용의 역사'

관용이라는 단어는 종교 전쟁이 한창이던 16세기 중반에 처음 사용됐다. 이 때의 뜻은 ‘용인하다’는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가톨릭교회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군주가 용인한다는 의미였기 때문.

두 개의 종교를 허용하는 일은 국가의 기본법에 위배되는 행위였지만, 국가의 안정성이라는 실용적 목적을 위해 관용은 일시적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의 많은 내용은 그래서 종교에 집중된다. 중세사회는 그리스도교가 지배한 사회이고, 근대사회는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를 무기로 삼아 그리스도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사회다. 그리스도교는 자신만이 진리요 구원의 길이라 확신하여 그리스도교에 대한 내외의 도전을 용납하지 않았다.

따라서 관용의 역사는 불관용적인 그리스도교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의 역사라는 인식이 이 책의 요지다. 계몽사상가 볼테르가 “그리스도교는 가장 관용적인 종교지만, 그리스도교인들은 가장 불관용적인 사람들”이라고 지적한 내용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저자도 관용이라는 관점에서 가톨릭교회와 함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어두운 역사를 지적한다. 종교개혁을 부르짖은 마르틴 루터의 양심의 자유는 관용으로의 문을 열기는 했으나,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폐쇄적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을 주도한 칼뱅을 비롯한 모든 종교개혁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불관용의 그리스도교회를 무너뜨린 힘은 종교개혁이 아니라 르네상스와 계몽주의였다. 이 같은 흐름에 고대 철학자들의 철학이 단단한 무기가 되었고, 그 힘은 스피노자, 로크, 몽테스키외, 볼테르 같은 계몽주의자에게 전이돼 관용의 의미가 제대로 정립됐다.

저자는 관용의 16세기적 제한적 의미는 자연법과 자연권 사상의 발전에 힘입어 변했다고 말한다. 바로 ‘나의 베풀기’에서 ‘너의 권리 존중’으로 말이다. 자신이 어떤 종교를 믿든, 그것은 군주의 관용과 관계없이 나의 자연권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관용이라는 말 속에 슬며시 포함된 ‘용서’의 의미는 삭제돼야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관용은 타자의 권리를 먼저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용의 역사=김응종 지음. 푸른역사 펴냄. 488쪽/2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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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금평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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