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발표 1시간 전 만난 이주열, 자장면 비우고선…

[단독]발표 1시간 전 만난 이주열, 자장면 비우고선…

이현수 기자
2014.03.04 06:06

3일 오후 12시 서울 중구 명동의 한 중식집.

붉은색 타이에 정장을 갖춰 입은 이주열 전 한국은행 부총재가 기자를 맞았다. 명함을 건네니 "나도 있긴 한데, 직책이 두 개라서…." 말끝을 흐리며 건네준 명함엔 '하나금융경영연구소 고문'이 찍혀있었다. 연세대 특임교수로도 활동 중이었다.

2시간30분 뒤면 그가 한국은행 차기 총재로 내정됐다는 사실이 발표될 예정이었지만 내색은 없었다. 1시간30분이 넘도록 한국은행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청와대로부터)연락을 받았느냐"는 질문에는 "저는 뉴스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지난달 머니투데이의 '한국은행 총재 하마평 지상 검증(본지 2월 14일자 4면 참조)' 인터뷰에서 이 총재 내정자는 "좋은 사람이 돼서 한은을 잘 이끌어 줬으면 한다"며 한은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20일전에 잡은 점심 약속이 실행된 이날, 대화를 돌이켜보니 그의 머릿속에는 '고향'인 중앙은행의 수장으로서 돌아가는 감회와 구상이 차곡차곡 들어차 있었다.

◇"2년간 잘 놀았다"…'절치부심'

그는 평생을 한은에서 보낸 정통 '한은맨'이다. 1977년 한은에 입행한 후 2012년 부총재를 끝으로 35년간 몸담았던 한은을 떠났다.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지만 퇴임할 때는 김중수 현 총재에 각을 세웠다. "'글로벌'과 '개혁'의 흐름에 오랜 기간 힘들여 쌓아온 과거의 평판이 외면되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작심발언을 한 것.

퇴임 이후 화재보험협회 수장으로 유력하게 거론됐지만 취임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퇴임 과정에서 한은 지도부와의 불화 등이 이유가 됐다. 이 총재 내정자는 "한은 부총재를 하고 나와서 놀면 중앙은행 위신이 안선다며 고위 정부인사가 주선해준 것이지만 결국 이마저도 불발됐다"고 말했다.

점심자리에서 이 총재 내정자는 퇴임사를 다시 곱씹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퇴임사가 아직도 회자되고 있지요. 김중수 총재 취임 후 2년간의 일들이 생각을 지배해 이전 33년을 되돌아볼 겨를이 없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습니다."

그는 부총재 재임 시 김중수 총재와의 불화도 간접적으로 전달했다. "부총재는 행내 인사를 제안할 수 있는데, 제가 건의한 사람들은 모두가 안 됐어요. 두 번, 세 번 마찬가지였지요. 좋아하고 신뢰하던 사람들이 은행을 다 나가게 됐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인사 제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날 얼굴색이 좋았다. 부총재 시절보다도 좋아졌다고 했다. "2년을 놀았는데, 놀면서도 시간이 금방 갔어요. 연세대 특임 교수로 강의도 나가고 있는데 이론을 알려주면 학생들이 지루해 하니, 통화정책 실무 강의 중심으로 했어요. 어제는 주말이라 동네에서 테니스 치고 저녁 먹고 귀가 했습니다."

◇4200명 중 3명안에 들어 해외유학 "야근이 싫어"

이 총재 내정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통화전문가'다. 한은의 핵심 보직인 조사국에 오래 머물렀다. 1998년 한은 조사부 국제경제실장, 2002년 한은 조사국 해외조사실장을 거쳐 2003년 한은 조사국장을 역임했다.

80년대 말 조사부(현재 조사국)에 있을 때는 전체 행원 4200명중 3명에게만 주어지는 행원 석사 유학 자격을 얻었다. 미국 듀크대에 갈 예정이었지만, 기숙사 제공이 안 돼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박사학위가 없다. 당시엔 해외유학 기준이 엄격했고, 한은에선 석사까지 지원해줬다는 것. 박사 학위에 도전하려면 한은을 나와야했고, 석사 지원금도 토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유학시절 야근을 안 했던 게 가장 좋았다"고 했다.

'야근 철폐'소신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일이 없는데 계속 앉아있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아요. 경우에 따라 밤을 새워야 할 때도 있고, 일찍 끝날 때도 있는것이죠. 조사부에 있을 때 제 경험이 그래요. 일이 없는데 과장만 쳐다보고 있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국장이 되고서는 오후 6시에 퇴근했다고 한다. 결과물은 자리에 올려놓으라고 한 채. "그래야 밑에 직원들이 힘들지 않아요. 일이 많고 꼭 해야 하면 알아서들 야근을 해요. 야근할 일이 없는데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어야 하는 게 제일 머리가 아프죠. 업무효율, 절대 오르지 않아요."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야근은 축복'이라고 말해 직원들에게 점수를 잃은 김중수 현 총재와는 이 또한 정반대의 지론이다.

◇"박승 총재 덕장, 이성태 총재 지장"

그는 박승 전 총재를 '덕장'으로 칭했다. 본인이 조사국장을 지내던 2004년 한 일간지 기자가 방에 찾아와 편하게 얘길 하고 사진까지 찍었는데, 다음날 아침 조간에 인터뷰 형식으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나간 적이 있다. '한 집 걸러 한 집이 실업자'라는 타이들로, 당시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였다.

"의도치 않은 일이었어요. 그런데 박 총재는 절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인사에서도 불이익이 없었어요." 이 총재 내정자는 박승 전 총재가 한은 행원 지원자를 일일이 면접한 뒤 '떨어뜨릴 수가 없다"며 전부 다 뽑으라고 했던 일화도 털어놨다.

지장으로는 이성태 전 총재를 꼽았다. "직원들이 스스로 일하게 하는 스타일이죠. 주말 미국에서 이슈가 터지면 '어느 부서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겠거니' 짐작만 하고 월요일에 보고를 받으셨어요. 휘어잡는 카리스마는 없지만, 조용히 매섭게 일하는 스타일이죠."

이 총재 내정자는 꼼꼼하기로 유명하다. 한은 관계자는 "조용하고 꼼꼼한 성격이지만, 금융위기 당시처럼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과감하게 일을 했다"고 설명했다.

공사구분이 분명한 일처리도 그렇지만, 평상시 일마무리도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다는 주변의 평가는 기자와의 만남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총재 내정자는 자장면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헤어지면서 "이르면 내일 총재 발표가 날 것 같다. 좋은 소식이 있길 바란다"는 덕담을 건넸다. 빙그레 웃으며 "인사권자의 뜻이지요"라고 답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1시간 뒤 이 전 부총재는 '내정자'로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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