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년도 산업·에너지 정책의 핵심 화두는 단연 '전력이다. 인공지능(AI)과 데이터센터, 첨단 제조업 확산으로 전력 수요는 구조적으로 폭증하고 있다. 반면 이를 뒷받침할 에너지 정책은 여전히 갈림길에 서 있다. 정부는 원전·재생에너지·전력망 확충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현장의 시선은 차갑다. 정책의 일관성과 실행력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원전 정책은 한국 에너지 정책의 민낯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역대 정부마다 기조가 급변했다. 그 과정에서 꺼낸 '공론화' 카드는 갈등을 관리하는 장치이면서도 결정을 미루는 수단으로 활용돼 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신고리 5·6호기다. 사회적 합의를 거쳤다는 명분은 세웠지만 공사 중단과 재개 과정에서 비용은 늘고 일정은 지연됐다. 산업 전반에 짙은 불확실성만 남겼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새롭게 탄생한 기후에너지환경부도 같은 전철을 밟으려 한다. 신규 원전 건설을 두고 또다시 공론화 절차를 시작했다. 이미 더불어민주당도 찬성했던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의 내용인데도 말이다.
재검토 사유가 불문명한 상황에서 공론화 과정은 불필요한 사회적 에너지 낭비다. 고작 두 번의 정책토론회와 한 번의 여론조사로 내년 1월까지 결론을 내겠다고 한다. 여론조사 방식조차 공개되지 않았다. 신규 부지 선정 절차는 이미 지연되고 있다. 누구를 위한 공론화인지, 과연 실효성은 있는지 의문이 꼬리를 문다.
공론화 이후도 문제다. 정해진 정책조차 일관성이 없으니 기업과 투자자는 늘 불안하다. '다음 정부에서는 또 바뀌지 않을까'를 먼저 계산한다. 장기 투자가 필수인 에너지 산업엔 치명적인 구조다. 원전이든 재생에너지든 결정 이후에는 정책의 연속성과 예측 가능성이 담보돼야 한다.
에너지 정책은 더 이상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산업 경쟁력과 국가 안보, 그리고 국민 부담이 직결된 냉혹한 현실의 문제다. 공론화가 갈등을 조정하는 수단일 수는 있어도 정책 그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내년 에너지 정책의 성패는 또 한 번의 공론화 쇼가 아니라 이미 내려진 결정들을 얼마나 책임 있게 집행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 필요한 건 토론이 아니라 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