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진의 '바냐 심촌'VS 조성하의 '반야 아재', 누구를 선택하시겠어요? [스테이지]

이서진의 '바냐 심촌'VS 조성하의 '반야 아재', 누구를 선택하시겠어요? [스테이지]

박병성(공연 평론가) ize 기자
2026.05.29 13:30

고아성과 심은경도 같은 역할로 연기대결
체호프 '반야 아저씨'에 대한 두 가지 해석
스타배우 참여로 체호프에 쉽게 다가가는 계기

LG아트센터의 '바냐삼촌'과 국립극단의 '반야아재'가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여 공연했다. '바냐삼촌'은 인물들의 개성을 선명하게 부각하고 관계를 명료하게 정리하여 체호프 입문자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서진과 고아성이 출연했다. 반면 '반야아재'는 1930년대 한국 농촌의 정미소를 배경으로 한국적 정서를 담아 번안했고, 조성하와 심은경이 출연하여 막막한 현실을 견디는 인간에 대한 위로를 전달했다.
같은 원작을 재해석한 이서진 고아성 주연의 '반야 삼촌'과 조성하 심은경 주연의 '반야 아재'. 사진제공=LG아트센터, 국립극단
같은 원작을 재해석한 이서진 고아성 주연의 '반야 삼촌'과 조성하 심은경 주연의 '반야 아재'. 사진제공=LG아트센터, 국립극단

지난해 LG아트센터와 국립극단이 비슷한 시기에 헨리크 입센의 '헤다 가블러'를 공연하여 의도치 않은 ‘연극 대전’이 이루어졌다. LG아트센터는 이영애를 30여 년만에 연극 무대에 소환했다. 반면 국립극단은 영화와 연극 무대에서 대체 불가한 카리스마를 보여준 배우 이혜영을 내세웠다. 유명 스타가 출연하는 동일 원작의 서로 다른 버전 공연은 공연 애호가들에게 비교하는 재미를 안겼다.

올해에는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가 같은 방식으로 맞붙는다. 2년에 걸쳐 이어진 우연이지만 관객들에게는 흥미로운 이슈가 생긴 셈이다. LG아트센터('바냐삼촌')는 바냐 역에 이서진, 소냐 역에 고아성을 캐스팅했다. 반면 국립극단('반야아재')은 바냐 역에 조성하, 소냐 역에 심은경을 내세웠다. 연극 무대에서 좀체 보기 힘든 대형 스타의 출연으로 캐스팅 소식만으로도 대중들의 관심을 모았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찰리 채플린의 말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작가는 러시아의 사실주의 작가 체호프일 것이다. 체호프의 작품에서는 중요한 사건은 주로 극 밖에서 이루어지고 극 안에선 지루한 일상이 반복된다. 체호프의 인물은 더 나은 삶을 꿈꾸지만, 좀처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설령 시도하더라도 대부분 실패한다.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 사랑 역시 번번이 엇갈린다. 무기력하게 삶에 허덕이면서도 끝끝내 삶을 견뎌내는 체호프의 인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알 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 '바냐 아저씨'는 이러한 체호프 연극 스타일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바냐 아저씨'는 19세기 말 러시아의 시골 영지를 배경으로 한다. 바냐는 죽은 누이의 딸 소냐와 함께 영지를 관리한다. 오십이 되도록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하지 못하고 늘 일만 하며 살아간다. 은퇴한 교수인 매형 세르브랴코프와 그의 아름답고 젊은 새 아내 엘레나가 영지를 방문하면서 그의 삶에 균열이 생긴다. 젊은 날 매형의 출세를 위해 헌신하며 작가의 꿈마저 접었던 바냐는, 매형의 명성이 허위임을 알아채고 삶을 허비했음을 깨닫는다. 그는 아름다운 엘레나에게 마음을 드러내지만, 엘레나의 마음은 영지를 방문한 의사 아스트로프에게 향한다. 소냐 역시 6년간 아스트로프를 남몰래 흠모해왔다. 소냐를 대신해 아스트로프의 마음을 떠보던 엘레나는 그 역시 자신에게 마음이 있음을 확인한다. 복잡하게 엇갈리는 관계는 세르브라코프가 영지를 팔자고 제안하면서 새로운 파국으로 치닫는다. 한바탕 폭풍우가 지나간 뒤 세르브라코프 부부는 영지를 떠나고, 바냐와 소냐는 다시 이전과 다름없는 바쁘고 무력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반야 삼촌', 사진제공=LG아트센터
'반야 삼촌', 사진제공=LG아트센터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동시대적으로 번안한 두 공연, LG아트센터의 '바냐삼촌'과 국립극단의 '반야아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원작에 접근한다. 두 작품 모두 체호프 특유의 무력감과 삶의 공허를 오늘의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지만, 서사를 조직하는 방식과 인물 해석의 결은 상당히 다르다.

LG아트센터의 '바냐삼촌'은 원작 속 인물들의 개성을 보다 선명하게 부각하고 관계를 명료하게 정리함으로써 체호프 입문자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바냐의 어머니 마리야는 과도한 학구열을, 엘레나는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강박을 강조해 개성이 명확한 인물로 만든다. 원작에서 다소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던 인물들은 보다 뚜렷한 관계 속에 배치되어 서사는 단단하고 명확해졌다. 체호프 특유의 흐릿한 여운과 공백의 미학은 다소 줄었지만, 대신 작품의 갈등 구조와 감정의 흐름은 한층 명확하게 전달된다.

무대 역시 이러한 연출 방향과 맞닿아 있다. 회색빛 벽면으로 구성된 심플하고 모던한 공간은 인물들의 음울한 내면을 시각적으로 환기한다. 큰 변화 없이 유지되는 무대의 정조는 삶의 막막함을 지속적으로 환기하며 관객의 시선을 인물과 서사에 집중시킨다.

반면 국립극단의 '반야아재'는 적극적으로 우리 정서를 담아 번안했다. 작품의 배경을 1930년대 한국 농촌의 정미소로 옮기고, 인물의 이름과 말투, 생활 감각까지 한국적 정서를 담아냈다. 바냐는 ‘박이보’, 소냐는 ‘서은희’로 이름을 바꾸고, 원작의 건조한 유머가 담긴 장황한 대사는 투박하고 정겹게 재탄생되었다. 특히 이 작품은 극의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일본 순경을 배치함으로써 식민지 시대의 불안감을 은근하게 스며들게 한다. 삶의 주변을 배회하는 일본 순경은 가족의 일상 깊숙이 침투하는 위협의 존재로, 시대의 암울하고 무력한 정조를 드리운다. '바냐삼촌'이 인물 관계와 서사의 결을 섬세하게 따라간다면, '반야아재'는 ‘막막한 현실을 견디며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위로’라는 메시지를 보다 직접적이고 힘 있게 밀고 나간다.

'반야아재'의 무대는 시각적으로 압도한다. 연못 위의 집이 회전하며 장면 전환을 이끌어내고, 짙은 회색빛 벽면에 투사되는 스크래치 영상은 인물들의 억압된 심리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거대한 정미소는 무기력하게 침잠해가는 반야를 연상시킨다.

'반야 아재', 사진제공=국립근단
'반야 아재', 사진제공=국립근단

캐릭터 해석에서도 두 작품의 차이는 선명하다. 이서진의 바냐는 그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툴툴거리고 시니컬하며, 일상의 불평과 냉소를 자연스럽게 내뱉는다. 엘레나와의 관계 역시 일방적인 짝사랑이라기보다 서로 반말을 주고받으며 일정한 감정적 교류를 형성한다. 원작 속 삶의 무력감에 짓눌린 바냐와는 거리가 있지만, 대신 오늘날 관객에게 익숙한 냉소적 인물로 다가온다. 거창한 기대도 이상도 없이 하루를 견디는 현대인의 초상에 가깝다.

조성하의 반야는 다른 결을 보여준다. 그는 세상없이 찌질하고 눈치 없는 인물이다. 오영란(엘레나)에게 서툴게 호감을 표현하다가 “정말 왜 저래”라는 핀잔을 듣는 모습에서는 애잔한 마음마저 든다. 그러나 한때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꿈을 간직한 그는 투박한 말투 사이사이에 현학적인 언어를 섞어 사용하며 지식인의 흔적을 드러낸다. 이서진의 바냐가 현실적 냉소를 체화한 친근한 인물이었다면, 조성하의 반야는 선택하지 못한 삶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연민을 자아내는 인물이었다.

소냐를 연기한 고아성과 심은경 역시 서로 다른 방향에서 인물을 구축한다. 고아성은 극적 상황에 대한 반응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이를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해낸다. 감정의 흐름을 정확히 포착하며 장면마다 설득력 있는 표정과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그의 소냐는 기본적으로 똑 부러진 성격이지만, 짝사랑하는 아스트로프 앞에서는 서툴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 심은경의 소냐는 슴슴하고 위축된 모습을 보인다. 무언가를 덧붙이기보다는 어리숙하고 자신감 없는 태도를 그대로 드러낸다. 같은 캐릭터라도 작품의 해석과 배우의 개성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창조해 낸다.

지난해와 올해, LG아트센터와 국립극단의 기획이 우연히 맞물리며 관객들은 두 편의 ‘바냐’를 비교해 감상하는 드문 경험을 누릴 수 있었다. 특히 이번 ‘바냐 대전’은 뚜렷한 사건이나 극적 갈등이 부족해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체호프의 작품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중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 무엇보다 스타 배우들의 참여로 체호프 작품의 매력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이 이번 두 공연이 남긴 가장 큰 성과가 아닐까.

박병성(공연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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