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룹 리센느가 데뷔 2년 만에 음악방송 1위를 거머쥐며 '중소돌(중소기획사에서 기획한 아이돌)의 기적'을 써 내려가고 있다. 대규모 자본을 들인 대형 기획사의 신인 아이돌이 주름잡는 시장에서 리센느가 역주행에 성공하자 업계에서는 '서사의 승리'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8일 음원 플랫폼 멜론에서는 리센느의 '러브 어택(LOVE ATTACK)'이 '톱100'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이 곡은 2024년 데뷔한 리센느가 같은 해 발매한 미니 1집의 타이틀곡으로 당시 멜론 차트에서는 900위권이었다.
리센느가 일으킨 돌풍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 14일 SBS Life '더쇼'에서 리센느는 리메이크곡 'Pretty Girl(프리티 걸)'로 1위를 차지했다.
신생 기획사인 소속사 더뮤즈엔터테인먼트는 2023년 본격적으로 걸그룹 육성을 시작했다. 2024년 2월 '향기로 다시 장면을 떠올린다'는 의미를 담아 Re(다시)에 Scent(향기)·Scene(장면)을 결합한 '리센느'라는 팀을 데뷔시켰다. 현재까지 아티스트는 리센느 단 한 팀이다.
화려한 홍보를 할 수 없었고 심지어 음악방송 무대에 서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당연한 수순처럼 리센느가 데뷔 후 선보였던 곡들은 대중에게 외면받았다.
생존 전략은 유튜브에서 찾았다. 리더인 원이는 여러 유튜브 콘텐츠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 삼촌뻘인 개그맨 이선민, 유영우에게 운전 연수를 받는 '나의 연수 아저씨'가 화제가 됐다. 경차를 타고 원이의 고향인 거제를 돌아다니는 에피소드가 큰 관심을 받았다. 이 콘텐츠로 원이는 삼촌 연령대인 30·40대와 운전면허를 막 딴 20대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원이의 예능감을 눈여겨본 제작사 솔파 스튜디오는 지난 2월 그의 개인 유튜브 채널인 '안녕하세요원이입니다잘부탁드립니다'를 개설했다.

원이의 솔직한 매력과 예능감으로 관심을 받던 중 일이 터졌다. 3월 말 올라온 영상에서 멤버 미나미가 '갸루' 분장을 하고 등장하자 원이는 "이러고 거제에 가면 시민들한테 혼난다"고 핀잔을 줬고, 이에 미나미는 "거제 야호"라고 외쳤다. 이 짧은 장면이 모든 플랫폼과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강타한 '밈(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퍼져나가는 유행)'이 됐고 바이럴이 시작됐다.
이후 영상에서 원이는 미나미와 고향 거제시를 찾았다. 추리닝을 입고 등장한 원이는 사투리를 쓰면서 맨손으로 갯지렁이를 끼워 낚시를 했다. 미나미는 '갸루' 차림으로 화려하게 꾸민 채로 원이 옆에서 파라파라 춤을 춰 두 사람의 간극이 웃음을 자아냈다. 해당 영상이 1000만회에 육박하는 조회수를 이끌어내며 화제가 되자 거제시는 리센느 멤버 전원을 '거제시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원이가 경주 출신의 멤버 제나와 하루 종일 사투리를 쓰며 서울 성동구 성수동을 돌아다니는 영상도 큰 사랑을 받았다. 영상 공개 후 제나는 '신라 공주'라는 별명이 붙었고 개설 5개월 만에 원이의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는 130만명, 조회수는 2억회를 넘어섰다.

리센느는 과거 중소돌의 역주행 성공 사례와는 다르다. 역주행은 주로 노래 하나가 반짝 주목을 받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후속곡이 관심을 끌지 못하면 금세 사그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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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EXID의 '위아래'와 브레이브걸스의 '롤린'은 각각 2014년과 2021년 군 위문 공연 영상이 주목을 받았고 여자친구는 2015년 야외무대에서 '오늘부터 우리는'을 부르며 과격한 안무를 하던 중 넘어지는 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역주행 서사를 썼다.
이와 달리 리센느의 경우 대중은 무대에 오른 아이돌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원이가 가진 서사와 인간적인 면모에 열광했고 같은 그룹의 다른 멤버들, 나아가 그들의 음악으로 관심을 확장했다.
특히 BTS, 블랙핑크 이후 K팝이 전 세계에서 사랑을 받게 되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트렌드가 될 강렬한 음악, 영어에 능통한 멤버, 여러 문화에서도 통하는 세련된 컨셉이 아이돌 시장의 성공 공식으로 여겨졌는데 이를 그대로 적용하지 않았던 점이 리센느의 성공 비결로 꼽힌다.
고등학교까지 거제에서 다닌 원이가 거침없이 자신의 지역성을 드러내는 인간적인 모습에 대중이 응한 것이다. 원이 뿐 아니라 미나미도 유튜브를 통해 원이와 함께 일본 본가와 모교를 찾고 옛 서예 스승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대형 기획사 소속 아이돌이 강한 음악과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비주얼과 컨셉을 내세우는데 대중은 피로감을 느꼈던 것 같다"며 "자연스럽고 소탈한 모습에 매력을 느끼지 않았나 싶다. 노래보다 멤버에게 쌓인 서사에 애정을 느낀 거라 이전 역주행과 달리 그룹의 인기가 오래 갈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대중이 리센느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으로 생각된다"며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않고 간절하고 절실하게 하는 20대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애정을 갖고 응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서사 이후에는 실력으로 관심이 옮겨가고 있다"며 "데뷔 후 지난 시간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멤버들이 묵묵히 실력을 갈고닦은 모습까지 재조명되고 있다. 멤버들의 서사에 애정을 갖게 된 대중이 다음에는 그들의 노래와 안무를 살펴보는데, 실력을 갖춘 그룹이라 밈으로 끝나지 않고 대중의 애정이 이어지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