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소 협력업체인 A사에 다니는 한 지인은 최근 거래 대기업의 4분기 실적악화 소식과 관련, '울수도, 웃을 수도 없는' 복잡한 심경이라고 토로했다. 그동안 '을'로서 감수해야 했던 설움을 생각하면 부진한 실적이 고소하다 싶다가도, 혹여 실적부진을 이유로 단가인하 요청 혹은 압박(?)이 거세지는 것 아닌가하는 우려도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비단 그 거래 대기업 뿐 아니다. 그는 자신의 회사와 거래하는 모든 '갑'회사와의 관계에서 이런 일이 반복된다고 했다. 그는 "그래도 갑이 잘되는 것이 다 같이 잘되는 것"이라는 말로 하소연을 마무리했다.
갑과 을의 이같은 불편한 공생관계는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해있다. 대리점이 주요 유통망인 건축자재 업계도 예외는 아니다. 폴리염화비닐(PVC) 등 플라스틱 원료를 대기업에서 납품받아 인테리어 자재 생산공장 등에 판매하는 B대리점주는 연말만 되면 가슴이 조마조마해진다. 가뜩이나 경기불황으로 수금조차 잘 되지 않아 월 마감 맞추기도 빠듯한데 새해 단가 조정을 이유로 본사에서 밀어내기 물량을 쏟아내지나 않을까하는 두려움에서다.
B대리점주는 종종 본사 직원이 접대할 손님을 만나러 갈 때 결제카드를 들고 동석하는 경우가 여전히 비일비재하다고 전했다. 이는 물론 본사 측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B대리점주는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 문 닫는 대리점들도 많은데 그래도 먹고 살 수는 있으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씁쓸한 우리사회 '을'의 자화상들이다. 을은 갑을 원망하면서도 떠받든다. 고깝다고 둘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를 놓을 수는 없다. 이 연결고리가 곧 생존을 담보하는 생명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남양유업 사태'에서도 나타났듯 지금처럼 갑이 우월적 지위를 남용해 부당한 요구를 을에 지속적으로 강요한다면 제2, 제3의 남양유업 사태가 재발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갑과 을이 진심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조금씩만 갖는다면 지금과 같은 갈등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경기불황으로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이나 너나할 것 없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고통은 나눌수록 줄어드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