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무슨일이?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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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남·북한이 분단 이후 첫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하면서 한반도 화해 분위기가 확산됐다. 하지만 김일성 주석이 회담 직전인 그 해 7월 8일 급사하면서 남북 정상회담은 무기한 연기됐다. 화해 분위기는 곧장 냉각된다. 하지만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후 정상회담을 위한 양국간 물밑접촉이 활발히 이뤄지더니, 북한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과 경제적 협력이 필요한 북한의 현실이 맞아떨어진 것. 결국 2000년 6월 13일, 김 대통령 일행이 탄 전용기가 평양 땅에 도착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예상을 깨고 이날 평양 순안공항에서 김 대통령 일행을 직접 맞았고 두 손을 맞잡은 두 정상의 모습이 전 세계에 보도된다. 김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이튿날인 14일 오후 김 대통령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에서 2차 단독 정상회담을 갖고 5개항의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했다. 공동선언문은 △자주적인 남북통일 △통일방안 공통성 인정 △이산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구나. 누구보다 너희들 자신에 대해 가장 깊이. 그것이야말로 혁명가가 가져야 할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란다."(체 게바라가 쿠바를 떠나며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 中)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체 게바라는 국립은행 총재, 재무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명실공히 쿠바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인간을 해방하기 위해 혁명가가 되고자 한 마음을 되새기며 1965년 3월 쿠바를 뒤로하고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떠난다. '영원한 혁명가' '라틴 아메리카의 돈키호테' '베레모를 쓴 제임스 딘' 등의 별명을 가진 체 게바라는 88년 전 오늘(1928년 6월14일) 아르헨티나 로사리오 중산층 가정에서 5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5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엘리트 코스인 의사의 길을 걷는다. 그는 여유가 있을 때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곳을 여행했다. 특히 23살 되던 해
더위가 본격 시작되던 14년 전 오늘(2002년 6월 13일), 중학교 2학년생 심미선, 신효순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국도 옆 갓길을 따라 걸었다. 언덕 넘어 300미터 가량만 더 가면 친구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날 의정부로 놀러 갈 예정이었다. 다음 날에 있을 효순의 생일을 축하할 겸 모이는 자리였다. 두 소녀들 뒤로 미 보병 2사단 44공병대대 소속 차량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차량은 맞은편에서 브래들리 기갑 전투차량 5대가 오자 중앙선을 넘지 않기 위해 갓길 쪽으로 차를 붙였다. 도로 폭(3.3m)보다 사고 차량의 폭(3.65m)은 더 넓었다. 장갑차는 갓길을 덮쳤다. 갓길에 있던 효순과 미선은 장갑차에 깔리고 말았다. 두 소녀의 웃음소리로 채워진 도로는 이내 참혹한 사고 현장이 돼 버렸다. 경기 양주시 효촌리 56번 국도에서 발생한 끔찍한 사고로 온 국민은 비탄에 잠기고 만다. 사고 당일 미8군 사령관이 유감의 뜻을 전했고 다음날 미 보병 2사단 참모장이
‘Red Furies’(붉은 악령) 'Red Devils'(붉은 악마) -현지 언론이 4강 돌풍을 일으킨 1983년 청소년 대표팀에 붙인 별명-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한국은 아시아 독립 국가 중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뤄냈지만 이후 기나긴 암흑기를 맞는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 본선 진출까지 실패하자 한국 축구계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기대를 모았던 1983년 6월 제4회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이하 청소년대회) 출전권 획득에도 실패한다. 동아시아 지역 예선 준결승전에서 북한과의 승부차기 접전 끝에 3대 5로 패배, 한국은 세계무대 진출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변이 일어났다. 1982년 11월 뉴델리아시안게임에서 북한이 경기 결과에 불만을 품고 주심을 집단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 이 폭력사건으로 북한은 아시아축구연맹(AFC)으로부터 2년간 출전 자격을 박탈당했다. 기회는 한국에게 돌아왔다. 북한을 대신해 동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3위를 차지한 한국이
1979년 국내에서 한 해 동안 음주운전자가 일으킨 교통사고는 2006건이었다. 사고로 인해 150명이 숨지고 1711명이 다쳤다. 사고 발생 건수로만 따져도 전년보다 46%나 급증했다. 차량을 소유해 운전하는 사람이 크게 늘면서 대도시 유흥가 주변을 중심으로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고가 급격히 늘어난 것. 결국 36년 전 오늘(1980년 6월 11일) 치안본부는 미국에서 음주감지기 400대를 도입해 전국 경찰에 나누어주고 음주 운전자를 강력히 단속토록 했다. '알코올 센서'라는 당시로선 생소한 장비가 등장했다. 이 음주감지기는 소형 휴대용 라디오 정도의 크기로 상단에 붙어 있는 파이프에 운전자가 입김을 불어넣으면서 버튼을 누르면 알콜의 함량이 숫자로 표시되게 제작됐다. 이 기계는 주로 교통경찰이 휴대하다가 불안정하게 운전을 하는 운전자나 교통사고를 낸 운전자의 호흡 1ℓ당 알콜흡인량을 알아내는데 쓰였다. 당시 혈중 알코올 농도 0.06% 이상을 마시고 운전하다가 적발되면 1년 이하의
1987년 6월 10일 오후 6시 전국 시내 곳곳에서 차량 경적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흰 손수건을 꺼내 흔들어 하얀 물결을 만들어냈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본부(이하 국본)'의 주최로 '6·10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시작된 순간이다. 국본의 방침대로 차량 경적소리가 울리자 민주주의에 목마른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6월 민주 항쟁이 시작된 순간이다. 경찰이 시위를 진압하기 시작하자 서울 쪽 시위대들은 명동성당으로 모여들었다. 이내 명동 성당은 경찰과 시위대의 팽팽한 대치 현장이 됐다. 당시 치안본부장과 안기부 차장이 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하려 하자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나를 밟고 가라'며 그들을 제지했다. 추기경의 보호 덕분에 항쟁은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더 이어질 수 있었다. 6월 민주 항쟁은 독재 정권에 대한 분노,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극에 달한 시민들이 벌인 전국 규모의 민주화 운동이다. 6월 10일 시작
2004년 7월14일, 경찰에 한 통의 전화가 온다. 그해 3월부터 4개월 동안 특정 손님의 전화를 받고 나간 출장마사지사가 줄줄이 사라지는 것을 이상히 여긴 한 보도방 업주의 제보였다. 경찰은 "출장마사지 여성을 요청하는 그 손님의 전화가 왔다"는 업주의 제보를 한 차례 더 받고 출장마사지사와 손님이 만나기로 약속한 현장에 출동해 한 남성을 긴급체포한다. 미제사건으로 묻힐 수 있었던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이 체포되는 순간이었다. 수사 결과에서 밝혀진 유영철의 범행 수법은 당시 사회를 놀라게 했다. 자신이 직접 만든 망치나 칼을 범행도구로 삼고, 증거인멸을 위해 방화·사체 훼손에 거리낌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2003년 9월23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모 대학 명예교수 부부를 첫 번째 희생양으로 삼은 뒤 같은 해 11월 중순까지 강남구 삼성동, 종로구 혜화동 일대 부유층 주택가를 돌며 9명을 둔기로 잔혹하게 살해했다. 삼성동·혜화동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용의자의 족적이 비슷한
서쪽에는 비잔틴제국, 동쪽엔 사산조 페르시아라는 두 거대국가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삶을 꾸려가던 아랍인들은 7세기 초까지만 해도 수백의 신들을 모시고 있었다. 이들은 아라비아반도 남부일대에서 통일된 민족 정체성, 강력한 정치체계 없이 유목민으로서의 삶을 영위했다. 이런 배경에서 서기 570년 메카의 귀족인 하삼가(家) 과부의 유복자로 태어난 무함마드는 유년기에 어머니마저 잃고 숙부 손에 크고 있었다. 그는 목동일을 하면서 숙부를 따라 팔레스타인 지방과 시리아 등지를 다니며 무역일을 배우며 자랐다. 무함마드는 25세에 15살이나 연상인 부유한 미망인 하디자와 결혼해 평온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경제적인 여유로 인해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게 된 그는 금식을 하며 사색을 통해 진리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마흔살이 되던 610년 히라 산(山) 동굴에서 명상에 잠기다 신의 계시를 받으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천사장 가브리엘의 "너는 신의 사자(使者)다"라는 음성을 들은
'공이 왼쪽 해저드(연못) 근처로 떨어져 풀섶(풀숲의 방언)에 자리했다. 모든 것이 날아가는 순간이었다.'(1998년 뉴스 기사) 1998년 7월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US 여자오픈에 출전한 만 20살의 박세리가 양말을 벗었다. 모두가 포기한 그때 그동안의 훈련을 증명하는 듯한 까만 종아리와 그에 대비된 하얀 발이 드러났다. 맨발로 연못에 들어가 워터 해저드에 걸쳐진 공을 처리해 낸 박세리는 이날 결국 우승했다. 박세리의 맨발 샷은 당시 외환위기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큰 희망이 됐다. 그로부터 약 7년이 흐른 2007년 6월7일(현지시간). 이 골퍼는 또 한번의 역사를 써냈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명예의 전당'에 아시아인 최초·역대 최연소(29세 8개월 10일)로 입성하게 된 것이다. LPGA 명예의 전당 회원이 된다는 것은 골퍼들에게 최고로 영예로운 일이다. 입회 조건이 까다로워 '여자 골프 명예의 전당'(LPGA 명예의 전당 전신)이 설립된 1950년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승세는 연합군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유럽 동쪽에서는 소련군, 남쪽에선 미국·영국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서 남부 이탈리아로 북상하면서 독일군을 몰아부치고 있었다. 하지만 서부전선에선 독일군의 주력이 그대로 유지된 채 북해와 대서양 해안지대를 장악하면서 전쟁이 답보상태에 빠지게 된다. 연합군은 전쟁종결을 위해 독일군의 방어망을 뚫고 유럽 대륙에 깊숙히 진격할 수 있는 교두보가 필요했다. 결국 그 해 12월 루스벨트·처칠·스탈린 등 미·영·소 수뇌들이 회동한 테헤란 회담에서 프랑스 해안지대에 대한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작전 실시가 결정된다. 회담 이후 미군과 영국군은 아이젠하워 장군을 정점으로 합동사령부를 신설하고, 검토 끝에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 해안을 상륙지점으로 정한다.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rd)'이란 명칭으로 불린 이 작전 시행일이 바로 72년 전 오늘(1944년 6월 6일)이었다. 'D-데이(Deliverance
"고난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드는 비타민이다." 2005년 당시 텍사스 레인저스 박찬호가 시즌 5승이자 메이저리그 통산 99승을 기록한 후 자신의 홈페이지에 남긴 문장이다. 이는 그의 야구 인생 전체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1994년 한양대 2학년에 재학중이던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명문 구단인 LA 다저스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동양인 선수는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인식됐던 메이저리그에 심지어 국내에선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선수가 한국인 최초로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당시 박찬호가 받은 계약금 120만달러는 미국 내 최고 유망주들도 받기 힘든 금액이었다. 박찬호는 다저스 입단 첫해 이례적으로 마이너리그도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 개막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낯선 이국 땅에서 의사소통은 물론 음식이나 문화, 인종 차별 등 모든 것이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는 그 해 4월9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데뷔전을 가지는 등 몇 차례 경기에 출전했지만 부진한 투구를 보였고 결
피의 일요일이었다.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는 자동 소총으로 무장한 계엄군이 진입했다. 탱크와 장갑차로 바리케이드를 밀어냈고 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발포가 시작되자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잠시 흩어졌던 군중들은 다시 뭉쳐 사람 장벽을 만들었고 일부 시민들은 화염병을 던지며 계엄군의 전진을 막았지만 잠시뿐이었다. 유혈 진압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지방 주요 도시에서도 시민과 학생들이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시내 주요 도로에서도 일반 시민들이 나서 군의 베이징 진입을 저지했다. 군은 이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수많은 시민들이 달리는 장갑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27년 전 오늘(1989년 6월4일) 발생한 톈안먼 사건이다. 1980년대 중반 중국의 지식인과 학생들 사이에는 자유·민주화 바람이 불었다. '흑묘백묘론'과 '선부론'으로 잘 알려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빈부 격차가 커지고 공산당의 부패가 심각해지자 이를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톈안먼 사건의 실질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