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친일파 유묵 셀프 추천' 유홍준, 불명예 사임

"저는 박물관 전성기에 관장을 지낸 참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박물관 식구들에게 아쉽고 미안하기만 합니다."
10월 21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하루에도 수만명이 찾는 우리나라의 대표 명소에 적막함이 감돌았다. 저명한 미술사(史)학자이자 중앙박물관의 얼굴인 유홍준 관장이 사의를 표명하면서다. 이재명 대통령은 당일 곧바로 사직안을 재가했다. 유 전 관장은 친일 인사의 글씨를 애국지사의 유묵(죽기 전 남긴 글씨)으로 잘못 전시하고, 자신의 개인 소장품이라는 사실을 숨겼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유 전 관장의 잘잘못을 떠나 박물관 안팎의 충격은 컸다. 중앙박물관과 13개 소속 박물관을 대표해 안팎에서 목소리를 내오던 그가 돌연 사의를 표명하자 박물관의 '키'를 잡아줄 사람이 없어졌다는 의미다. 유 전 관장은 자신의 유명세를 십분 활용해 'K박물관'을 세계적 수준으로 키우고자 했다. 지난해 세계 3위 수준의 650만 관람객 달성도 그의 역량이 작용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부관장제 도입, 관람료 유료화 등 박물관 누구도 쉽게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문제에 메스를 들이댄 것도 유 전 관장의 작품이다. 중앙박물관이 단순한 전시공간이 아니라 복합 플랫폼으로의 탈바꿈을 노리는 것도 그가 관장에 오른 후다. 한 지역박물관 관장은 "유 관장의 공과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부임 후 우리 박물관의 주목도가 높아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중앙박물관이 그가 물러나는 자리를 '퇴임식'이 아닌 '이임식'으로 붙인 이유도 그가 쏟았던 열정에 대한 경의로 해석된다. 이임식 현장에서 그를 기리는 시를 중앙박물관 직원이 낭송하기도 했다. 중앙박물관 관계자는 이임식이라는 명칭에 대해 "앞으로 더 좋은 자리에서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설명했다.

이제 박물관계의 눈은 후임자로 쏠린다. 지금 중앙박물관은 박기홍 행정운영실장이 대리를 맡아 운영 중으로, 높아진 위상을 감안하면 하루빨리 인선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현재 거론되는 인사는 현직 국공립 박물관장과 고위급 공무원, 학계 등 3~4명이다. 외부 인사보다는 내부 전문가가 유력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구체적인 후보군이 정해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지만 이르면 올해 안에 윤곽이 나올 전망이다.
박물관계에서는 유 전 관장 후임으로는 유명 인사보다는 내부를 단합하고 안정적으로 조직을 이끌 인사가 오기를 기대한다. 중앙박물관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거세진 만큼 후속 절차를 잘 봉합할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중앙박물관의 상급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는 유 전 관장뿐만 아니라 전시품 관리와 검증 등 모든 절차에 대해 종합적으로 집중 감사를 예고한 상태다.
숙제도 슬기롭게 풀어야 한다. 중앙박물관은 5.5%에 그치는 외국인 관람객 비중(지난 8월 기준)도 높여야 하며 주차장·카페 등 부족한 기반 시설 확충, 부족한 지역 박물관 관람객 숫자 등 문제에 직면해 있다. 한 박물관계 인사는 "국공립 박물관의 (숙제에) 대한 공감대는 이제 충분히 형성됐다고 본다"며 "이제는 외부에 메시지를 내기보다는 박물관 내부의 문제에 신경쓸 때"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