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연이은 전기요금 체계 개편으로 요금 인하를 추진하는 가운데 한국전력은 요금 인상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전력정책에서 엇박자가 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전은 200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부채 해소와 송전망 건설 등을 위해 요금인상을 통한 재원 확보가 필요한 상황이다.
반면 중동전쟁으로 인한 물가 부담과 민생, 산업 경쟁력 등을 고려하면 정부가 전기요금 인상을 결정하기도 쉽지 않다. 결국 전기요금 인상 없이는 한전의 재무구조 개선과 메가프로젝트 성공을 위한 전력망 투자도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20일 정부와 국회에 따르면 지난 19일 진행된 한전 국정감사에서 김동철 한전 사장은 "전력망 건설에 필요한 재원은 적어도 국민 부담을 통해서 마련하는 게 맞다는 것이 제 소신"이라며 "최소한의 전기요금 인상 필요성이 있다"고 밝혔다.
그동안 김 사장은 민생과 직결되는 전기요금 인상에 대해 말을 아껴왔지만 대규모 송전망 투자와 재무구조 정상화 등 현안의 시급성이 커지면서 평소의 소신을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현재 한전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가스가격 급등으로 인한 수십조원 규모의 누적 적자와 210조원에 달하는 부채 등으로 재무구조 개선이 시급한 상황이다. 특히 러우 전쟁 당시 유동성 확보를 위해 자본금·적립금 합계의 5배까지 확대했던 사채발행한도가 2028년부터 다시 2배 이내로 축소되면서 내년말까지 약 20조원 규모의 부채 감축이 필요할 것으로 분석된다.
한전이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5년치 전기요금에 해당하는 25조원 선납을 요구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지난 12일 국감에서 김재군 한전 전력계통본부장 부사장은 "한전의 사채발행한도를 내년 말까지 2배 이하로 줄여야 한다"며 "자체 문제해결을 위해 전기요금 선납을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호남 반도체와 AI(인공지능) 데이터센터 등 메가프로젝트로 인해 전력수요 급증이 예상되면서 이에 따른 대규모 전력망 구축도 필요하다.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상으로도 약 113조원의 전력망 투자가 필요한데 12차 전기본 전력수요 전망에서는 11차 대비 전력수요가 35.7GW(기가와트) 증가할 것으로 추산됐다. 전력수요가 늘어난 만큼 전력망 투자 규모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상황인데도 정부는 최근 연이은 전기요금 개편을 통해 요금 인하를 추진해 왔다. 지난 4월에는 낮 시간 산업용 전기요금은 낮아지고 밤 시간 요금은 올리는 계절·시간별 전기요금 개편이 시행됐다. 낮 시간 발전량이 맞은 재생에너지 사용을 유도해 전력계통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개편에 따라 산업용 전기요금은 약 1% 가량 인하 효과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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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올해 말에는 지역에 따라 요금을 차등 적용하는 산업용 지역 전기요금제가 시행된다. 수도권에서 먼 영남과 호남의 산업용 전기요금을 최대 10% 인하해 지역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차원이다. 이로 인해 산업계는 연간 약 2조8000억원의 요금 절감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분석된다. 바꿔 말하면 연간 2조8000억원 만큼 한전의 매출이 감소한다는 의미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전기요금 인상을 추진하려면 산업용이 아닌 주택용 요금인상을 고려해야 한다. 지난 몇년간 산업용 전기요금만 올리면서 형평성을 위해 주택용 요금도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하지만 중동전쟁의 장기화로 에너지 가격 부담이 커지면서 정부가 주택용 전기요금 인상 카드를 꺼내긴 쉽지 않은 상황이 됐다. 지난 3월부터 6개월 한시적으로 시행하기로 했던 석유 최고가격제도 무기한 연장된 상태다.
전기요금 인상을 하지 않는다면 한전의 재무구조는 지속적으로 악화하고 전력망 투자 여력도 감소할 수밖에 없다. 정부 재정지원과 일반 차입 등의 방법도 있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김 사장이 국감에서 "국민 부담을 통해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고 발언한 것도 이런 이유다.
유재선 하나증권 연구원은 "유연탄과 LNG(액화천연가스) 가격 강세로 원가 부담은 가중되고 지역별 차등요금제 시행에 따른 이익 감소로 한전의 중장기 실적에 부담이 될 전망"이라며 "올해 4분기 실적은 적자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