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 비무장지대에 들어가 생태조사를 했던 경험이 있다. 당시에 우리 군이 아닌 유엔사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현장에서는 어디가 지도에 표시된 군사분계선인지 알기 어려웠다. 범람과 퇴적을 거치며 지형이 달라져 있었다.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라는 질문에 안내자는 묵묵부답이었다.
거의 30년이 다 되어 그 질문이 새삼 떠올랐다. 지난달 21일 비무장지대에서 우리 장병들이 지뢰 폭발로 부상을 입었다. 합참은 이달 5일 북한군이 군사분계선 남쪽에 매설한 지뢰가 원인이라고 밝혔다.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고,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군사분계선이 어디인지에 대해 북한은 물론이고 우리군과 유엔사조차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1953년 설치된 1292개의 군사분계선 표지판 가운데 현재 식별되는 것은 200개 내외로 알려지고 있다.
경계가 불분명하다고 침범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책임을 묻고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과 별도로 미래의 분쟁을 예방하기 위한 일도 병행해야 한다. 서로 다른 지도를 든 병사들이 무기를 겨누는 상황을 방치할 수는 없다. 지도 위의 작은 오차가 현장에서는 생명을 위협한다.
필요한 것은 군사분계선 위치를 공동으로 확인하고 좌표와 표지를 정비하는 일이다. GPS를 비롯한 기술적 발전으로 측량 기술은 과거에 비해 훨씬 정밀해졌다. 문제는 어느 자료를 기준으로 삼고 서로 이견이 있는 구간에 대해 어떻게 합의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다. 일단 우리군과 유엔사부터 합의를 도출하고 이후 북한과의 협의와 현장확인을 진행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과거와 같은 거창한 남북협력을 기대하기 어려울 때일수록 상호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작은 의제가 오히려 돌파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제안이 현실화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분단을 영구화한다거나 땅을 내준다는 비난이 잇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진행하고 있는 국경 요새화에 대해 막연한 비판과 불안감 대신 우리의 병력 운용도 장기적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이 진행하고 있는 요새화가 마무리 된 이후 북한측이 접경지역에서의 병력감축과 후방이동, 그리고 복무기간 단축 등의 조치를 취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중국과 러시아에 대규모 인력을 파견해 외화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변화가 나타난다면 우리의 휴전선 병력배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 지금부터 고민해야 한다. 155마일 휴전선에 병력을 촘촘히 배치해 방어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현재도 첨단 감시장비 배치와 무인화 감시체계 구축이 진행되고 있지만 기존 시스템을 대체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변화도 고민해야 한다.
벽을 허물면 평화와 번영이 찾아온다고 믿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벽을 세우는 시대가 오고 있다. 시대의 조류가 바뀌고 있다. 어떤 벽을 어디에, 어떻게 세울 것인지를 챙겨야 한다. 명확한 경계설정은 불확실성을 낮춰줄 수 있다. 서로 같은 선을 확인하는 것은 그 첫걸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