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의(正義)의 철학자'로 불리는 황경식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1985년 '사회정의의 철학적 기초'라는 저서 초판서문에 정의를 실현하는 어려움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 적이 있다.
"이 세상의 피해는 모두 괴로운 것이지만 부당한 피해(부정의로 인한 피해)는 더욱 가슴 아픈 일이다. 운명적인 피해라면 사람들은 서로 협동, 연합하지만 부당한 피해는 오히려 불화와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정의의 문제는 그 단초부터 흥분을 유발하기 쉬운 주제로 보이며, 이러한 문제를 두고 하등의 감정적 동요가 일지 않는 사람은 일단 자신의 정의감을 재고해 봄직하다.
그러나 단순한 감정적 흥분만으로 처리될 수 없는 데에 또한 정의가 요구하는 준엄한 냉정성이 있다. 사회의 부정을 개탄하고, 대국적인 울분을 토로하기는 쉬우나 그러한 병폐를 차분히 진단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인 것이다""
약 30년 전에 쓴 이 서문을 읽으면서 오늘날 한국 사회 전반을 휩쓸고 있는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476명(추정)의 탑승자가 타고 가던 세월호 침몰 과정과 그 이후 이어진 수많은 희생의 참담한 아픔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대응은 무엇인가. 30년 전 한 철학자가 서문에서 던진 '부당한 피해'가 없는 사회에 대한 답을 아직도 찾지 못하는 미성숙 단계에 있다.
앞만 보고 달렸던 고도성장의 한국 사회 내면에 잠재해 있던 부정과 부조리, 불합리로 인해 아직 피지도 못한 청춘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안타깝게 희생됐다.
자연재해로 인한 희생이었다면 서로 껴안고 위로하며 위기를 함께 극복해나가자고 목소리를 합칠 텐데….
부정의한 이득에 눈이 먼 선주와 자신들의 의무를 외면한 채 승객들을 버린 선장을 비롯해 자신들만 탈출한 일부 승무원들, 사고 이후 정부의 부실한 대응은 '부당한 피해'에 대한 공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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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참사는 한국 사회가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옆으로 제쳐놨던 도덕과 의무, 정의에 대해 다시금 돌이켜보게 하는 참담한 교훈이다.
하지만 이번 희생에 따른 분노의 강점을 불화로만 끝내서는 안될 일이다. 부정의에 대한 분노는 당연한 일이지만 과거와 같이 들불처럼 일어난 분노로 몇몇 범죄자를 찾아 그들을 단죄함으로써 위안을 삼고 끝낼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또 이번 참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세력들이 나오면 이는 불화를 조장하는 불씨가 될 것이며, 정의를 세우는 길은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번 사고의 책임 문제는 명확하지만, 그 책임의 주변에는 우리 모두도 서 있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서로 남 탓을 하는 불화가 심화되면 세상은 '공정으로서의 정의'로 나아가기보다는 '각자에게는 그 나름의 정의가 있다'는 논리가 판을 치게 되고 부정의도 정당화하는 구실을 마련해주게 된다. 아픔과 분노의 크기만큼 준엄한 냉정함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황 교수는 당시 서문에서 정의의 문제가 해결되기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의 실천의지 부족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으면 망각의 편리함에 기대어 '부정의'를 잊는 우리의 의지를 꼬집는 대목이다.
우리의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항상 정의는 분노와 불화만 남긴 채 사그라지고, 부정의는 그 생명력을 이어왔다는 것. 분노와 불화를 줄이고 준엄한 냉정함으로 정의를 세우는 기회로 삼는 것이 부당하게 피해를 본 피해자와 희생자의 뜻을 기리는 일이다.
아직 구조되지 못한 실종자들이 노란리본의 바람대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담아 "미안합니다. 반성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참담한 일이 없도록 바꿔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