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 발묶인 기업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로 재판 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법 리스크가 1500일째로 접어들었다. 재계에선 새 정권 출범 전부터 시작해 정권이 끝날 때까지 단 하나의 재판으로 지나치게 기업을 옥죄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16년 11월4일 참여연대가 이 부회장을 뇌물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지 22일로 1500일(만 4년1개월8일)을 맞는다. 하지만 아직도 이 부회장 재판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21일 이 부회장의 81번째 재판이 열렸고, 오는 30일에도 82번째 재판이 진행된다. 그나마 이 재판은 파기환송심의 최종 변론기일로 기나긴 법정 재판은 끝나지 않는다. 이 부회장은 지난 4년여 동안 한 달에 평균 두 번 꼴로 재판에 불려다녔다.
지난 4년여간 이 부회장이 검찰이나 특검에 소환돼 조사받은 횟수만 10회(뇌물죄 혐의 8회, 삼성바이오 혐의 2회)다. 이 조사를 시작으로 구속영장 실질심사 3회, 재판 81회(1심 54회, 항소심 18회, 파기환송심 9회)가 줄기차게 계속됐다. 이 부회장은 2017년 2월17일부터 353일 동안은 구속상태에서 재판을 받기도 했다. 단 7일이 모자라는 1년간의 수형생활을 한 것이다.
이 뿐 아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관련 수사도 2019년 12월부터 시작해 지난 8월까지 무려 1년 8개월간 계속됐다. 이 부회장은 시세조정 및 업무상 배임 혐의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는데 검찰은 50여 차례의 압수수색과 430여 차례의 임직원 소환을 계속했다.
이 부회장이 중요한 경영활동 중에도 압수수색은 예외 없이 이어졌다. 2018년 7월 이 부회장이 인도 노이다 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문재인 대통령을 영접한 다음날, 검찰은 삼성전자 수원 본사에서 당시 이상훈 이사회 의장실을 압수수색했다.

2018년 8월에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간담회 후 삼성이 180조원을 투자하고, 4만명 고용 계획을 밝힌 날에도 삼성경제연구소에 대한 압수수색이 이어졌다.
이 부회장이 2018년 9월18일부터 20일까지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단으로 방북하기 전날에도 예외는 없었다. 당시 삼성에버랜드 용인 본사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이 진행됐다. 지난해 4월에는 문 대통령이 삼성전자를 방문해 시스템반도체 비전선포식을 가진 직후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임직원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이 이뤄졌다.
독자들의 PICK!
재계에선 삼성이 망하기 전까지 정치 공세가 계속될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특정 기업에 대한 먼지털이식 수사와 재판 장기화가 기업의 미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김용근 한국경영자총협회 상근부회장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전방위적이고 장기적인 기업 수사와 재판이 이례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정치권에 대해 항상 을의 입장인 기업을 뇌물죄로 몰아 이렇게 오래 발목을 잡는 상황에서 망하지 않는 게 이상해 보일 정도"라고 밝혔다.
일부에서 제기되는 이 부회장 재판과 삼성을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김용근 부회장은 "기업 현실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얘기"라며 "기업은 리더십 부재가 최대 리스크로 총수인 이 부회장 문제는 삼성 미래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업인에 대한 과도한 형사 처벌 분위기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대학원 교수는 "뻔한 혐의를 갖고 정권 초기에 수사를 시작해서 정권이 끝날 때까지 재판을 하고 있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외국의 경우 배임죄 자체가 흔하지 않은 데다 형사 재판을 이렇게 장기간 하는 경우는 없다"고 밝혔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이제 겨우 1라운드 끝난 거죠. 다음 재판도 최소 3~4년 걸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무려 4년을 이어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국정농단 파기환송심이 내년 초 선고를 거쳐 마무리될 전망이지만 삼성의 표정은 밝지 않다. 지난 9월 검찰이 기소 방침을 발표한 경영권 승계 의혹 재판이 또 다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해당 사건의 복잡성으로 볼 때 1심만 2년 이상 걸릴 것이란 암울한 전망이 나온다.
◆4년 끈 재판 끝나면 또 '경영권 승계 의혹' 재판 '첩첩산중'
법조계에 따르면 삼성 관련 재판은 위에서 언급한 국정농단 뇌물 공여 혐의와 경영권 승계 목적의 시세조종·배임 혐의 재판 외에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와해 사건 항소심 △에버랜드 노조와해 사건 항소심 △삼성바이오 분식회계 행정소송(피고 증선위) △삼성바이오 증거인멸 항소심 △삼성물산 합병 주식매수청구권 가격 소송(민사)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중이다.
이중 이제 막 첫 공판준비기일이 열린 경영권 승계 의혹 재판이 삼성 입장에선 가장 큰 부담이다. 검찰 기소의 적절성을 떠나 수사 속도가 워낙 더뎌 기업 경영의 발목을 계속 잡고 있어서다. 검찰이 기소하기까지 2년이 걸렸는데, 이 과정에서 압수수색 30여차례, 임직원 소환조사는 수백차례에 달했다. 검찰수사심의위원회의 '불기소 권고'에도 검찰은 두 달을 끌다 기소를 결정했다.
재판은 이보다 더 장기전이 예상된다. 삼성 임직원 수십여명의 증인신문이 기다리고 있고, 회계학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일 정도로 쟁점 공방이 치열해 재판부가 심리하고 판단하는 시간이 만만치 않게 걸릴 전망이다. 지난 9월 검찰의 기소 결정 직후 "삼성의 향후 5년이 발목 잡혔다"는 목소리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경영에 지나친 형사 개입,재판·소송 '남발'…기업 존중 필요도
법조계는 삼성이 겪는 사법 리스크가 한국 기업들의 고충을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본다. 회사 경영에 대한 재량권 침해, 기업에 대한 처벌조항 남용, 경영권을 뒤흔들 정도의 상속세 등이 선진국과 다른 한국 법조계의 고질적 문제로 꼽힌다. 이는 기업인의 자율성과 창의성 위축으로 이어진다.
특히 '경영판단의 원칙'이 인정되지 않는 풍토가 문제라는 지적이다. 경영판단의 원칙이란 기업인이 기업 이익을 위해 판단했다면 예측이 빗나가 손해가 발생했더라도 배임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미국 판례에선 이를 인정하고, 독일 주식법에는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한국 상법에서 찾아볼 수 없다.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장은 "한국은 민사로 해결할 것을 형사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인 게 배임죄"라며 "기업에 대한 처벌 조항은 예방을 목적으로 한다고 보기엔 너무 과도하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은 경영판단의 원칙을 존중하는데 한국 법원은 이사회의 경영 판단을 자꾸 들춰보고, 잘잘못을 판단하니 자연스럽게 재판과 소송이 늘어난다"고 밝혔다. 사법 불신이 강해 소송 시 재판이 장기화되는 것도 문제다. 일본은 1심에서 재판이 끝나는 경우도 많다.
경제계 한 관계자는 "국회에서 기업을 응징하려는 포퓰리즘 법률을 발의하고, 검찰은 별건 수사로 재판을 늘리는 행태를 벌이고 있다"며 "사회 전체가 기업 활동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박소연 기자
"앞으로 기업인들이 더 자주 법정에 서야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뿐 아니라 화학물질관리법과 제조물책임법까지 사고의 인과관계도 따지지 않고 기업인을 무조건 처벌하겠다는 법률이 효과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경제계 한 관계자는 국회에서 입법을 추진 중인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입법 효과가 낮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법은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기업인을 '5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할 수 있다. 이 뿐 아니다.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이나 화학물질관리법, 제조물책임법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기업들의 공급망 전체에 걸쳐 기업인은 자칫 잘못했다간 '감옥'에 가야 하는 사법 리스크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이처럼 "기업인은 처벌을 각오하고 경영에 임하라"는 식의 '형벌만능주의'는 과연 효과가 있을까?
상법·회사법 전문가인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명예교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최 교수는 "기업인을 처벌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진 않는다"며 실제 기업인 처벌이 능사가 아닌 대표 사례로 '산업안전보건법'을 꼽았다.
올 초 기업인(사업주) 처벌 강화를 골자로 한 산업안전보건법이 전면 개정됐지만 지난 상반기에 산업재해 사망자수와 재해자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오히려 5명과 1486명이 증가했다. 기업인 처벌과 산업재해 사고 간에 아무 연결고리가 없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사고 터지면 '특별법'으로 기업 압박하는 구조가 문제
최 교수는 이처럼 기업인을 옭아매는 법률이 국회에서 '인기영합주의'에 입각해 속속 만들어지는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는 "정부와 국회는 항상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건이 터지면 기존 법 체계와 잘 맞지도 않는 특별법을 만들며 '할 일 다 했다'는 식"이라며 "예방 효과도 없고, 기업을 한국에서 내쫓는 역할 이상은 기대할 수도 없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기업의 지나친 사법 리스크를 근본적으로 줄이는 방법은 없을까.
최 교수는 국회와 기업의 공동 노력이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국회는 기업인 처벌이 아니라 산업 특성에 맞는 법률을 개발하고, 기업은 기업대로 'ESG'(환경·사회·지배구조)처럼 자발적으로 강도 높은 윤리경영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최 교수는 "사회와 환경으로부터 괴리된 기업은 존속할 수 없다"며 "이런 의미에서 ESG에 대한 선제적 대응 같은 기업들의 발상의 전환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가혹한 4중제재, '공포감' 조장 과잉범죄화도 피해야
재계에선 기업을 상대로 가혹한 수준의 처벌을 낮춰야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중대재해법만 해도 '사업주 개인처벌', '영업정지', '작업중지' 등 행정제재는 물론 '징벌적 손해배상'까지 '4중 제재'를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최근 30개 국내 경제단체들과 업종별 협회들은 "중대재해법은 모든 사망사고 결과에 대해 인과 관계 증명도 없이 사업주에게 책임과 중벌을 부과한다"며 "기업인들은 중형에 처해질 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투자와 활동을 주저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업인의 형사처벌 조항을 담은 규제 입법만 늘어나면 자칫 기업인 대상 '과잉범죄화' 현상이 불거질 수 있다는 우려도 들린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곤 형법에 규정된 형량의 3분의 1이 경과하면 가석방을 해주는 규정을 기업인에게 적극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한 재계 관계자는 "'기업범죄' 낙인은 글로벌 경영을 해야 하는 기업인에겐 치명타"라며 "해외 선진국과 비교해 과도하게 엄중한 기업인 처벌 규정은 다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정혁 기자

"과거보다 위법행위를 하기 어려워진 것은 분명하다. (중략) 앞으로 발생할 새로운 유형의 위험에 대비한 선제적 예방과 감시 활동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에 대한 평가는 평가단 전문심리위원 3명 가운데 강일원 전 헌법재판관이 낸 두문장으로 요약된다. 강 전 재판관의 평가는 준법감시위의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담으면서 준법감시위 만능주의에도, 준법감시위 무용론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평이다. 어떤 제도도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전제로 기업의 준법 강화를 위한 새 가능성을 열어둔 평가라는 게 법조계와 재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재계에서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결과와 별도로 준법감시위가 기업 준법 경영의 새 기준으로 자리잡을지에 주목한다.
◆전에 없던 준법 시스템…"위법행위 어려워졌다"

삼성 준법감시위는 삼성전자 등 7개 계열사의 준법 감시를 위해 지난 2월 설치된 독립위원회다.
그동안 준법감시위 발표와 강 전 재판관의 평가를 종합하면 준법감시위 감시 범위는 사외이사제 등 기업 경영진 견제 수단으로 도입됐던 기존 제도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준법감시위는 계열사 이사회와 경영위원회의 주요 의결이나 심의사항에 법을 위반할 위험요인이 없는지 사전 모니터링을 하고, 사후검토를 통해 경영진의 법 위반 행위를 직접 조사할 권한을 갖는다.
실효성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독립성과 자율성도 확보했다. 준법감사위원 선정에서 경영진 입김을 배제하면서 6명의 위원 중 삼성 내부 위원인 성인희 사회공헌업무총괄 사장을 빼면 나머지 5명을 '재벌 개혁'에 적극적인 의견을 표명했던 진보 성향의 인사로 구성했다. 강 전 재판관이 "위법행위를 하기 어려워졌다"고 평가한 배경이 여기 있다.
◆이재용 대국민사과 이끌어…일부 한계도

성과 역시 적잖다. 준법감시위 출범 이후 10개월 동안 삼성그룹의 변화는 '준법감시위가 삼성의 최고 권력기구가 됐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준법감시위의 권고대로 이 부회장이 직접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자식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한 게 대표적이다.
삼성그룹의 대표적인 문제로 지적됐던 무노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노사관계 자문그룹를 설치하고 노조 활동을 허용하는 조치도 준법감시위의 값진 성과로 꼽힌다.
강 전 재판관 지적대로 한계도 존재한다. 준법경영을 위협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위험을 감시·감독할 만큼의 획기적인 체제는 눈에 띄지 않는다. 준법감시위 권고를 계열사에서 따르지 않을 때 강제할 수단도 마땅치 않다. 강 전 재판관은 보고서에 "결국 최고경영자의 준법 의지와 여론의 감시에 준법감시위 실효성과 독립성 유지가 달려 있다"고 적었다.
◆삼성발 준법 의지, 재계 확산 초읽기

국내 기업 가운데 준법감시위를 설치한 곳은 삼성그룹과 부영그룹 정도다. 전적으로 자발적인 결정은 아니었지만 재계에선 두 그룹의 준법감시위 설치가 상당한 영향을 줄 것이라고 본다.
재계 한 인사는 "경영진이 부정의혹으로 재판을 받게 되면 글로벌 시장에서 이미지가 깎이는 수준이 아니라 신인도나 실적에서 치명적 타격을 입는다"며 "기업의 준법경영에 대한 요구가 각종 계약이나 협업 등 실적으로 반영되는 비중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기업 스스로도 내부 감시에 더 주력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GE·지멘스도 내부 시스템 마련 거듭나

미국에서도 준법감시제도와 관련된 연방 양형 기준 제8장이 기업 문화를 송두리째 바꾼 제도로 평가받는다. 준법감시제도를 유도한 양형 기준이 기업의 위법 행위를 억제하고 감시·보고하는 내부 시스템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GE(제너럴일렉트릭)의 사례는 미국 공정거래위원회에서도 선정한 모범 사례로 꼽힌다. GE는 이사회 산하에 준법감시위원회를 둬 법 위반 사안에 대해 최고경영자가 책임지도록 했다.
독일 지멘스가 2006년 분식회계와 공금횡령, 뇌물제공 등 위법행위로 100억유로(약 13조7000억원)의 벌금을 부과받는 등 위기를 겪다가 2017년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1위에 올라선 것도 전담 준법감시를 제도적으로 도입하는 등 기업 쇄신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심재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