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정유기업들의 몸값이 중동 전쟁 발발 이후 치솟고 있다. 원유 한 방울 나지 않는 국가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정제·수출 인프라를 갖춘 데다 위기 상황에서도 안정적인 석유제품 공급이 가능하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공급선으로 떠오르면서다.
현재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국산 석유제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SK에너지와 GS칼텍스,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정유4사와 접촉을 늘리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14일 뉴질랜드 정부 관계자들이 SK에너지 본사를 직접 방문해 한국산 석유제품의 안정적인 공급 협조를 요청한게 대표적이다.
현재 뉴질랜드는 석유제품 전량을 사실상 해외에서 조달하고 있다. 뉴질랜드 석유제품 수입시장에서 지난해 한국산 비중이 약 40.7%에 달한다. 뉴질랜드가 2018년 석유·가스 탐사 금지 정책을 도입한데 이어 2022년에는 자국 내 유일한 마스든포인트 정유공장까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한국과 싱가포르, 중국 등 아시아 대형 정유사들이 더 저렴하고 효율적으로 석유제품을 생산하면서 경제성을 이유로 공장을 폐쇄한 것이다.
뉴질랜드 입장에서는 이미 한국산 석유제품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공급 차질 가능성 자체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SK측도 뉴질랜드와 오랜 기간 공급 협력을 이어온 만큼 글로벌 공급망 불안에서도 안정적으로 석유제품 생산과 공급이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뜻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뉴질랜드 외에도 호주와 일본, 미국 등 주요 수입국들은 한국 정유기업들과의 협력 강화를 잇달아 요청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경유 수출 제한을 자제해달라는 의견을 전달했으며, 미국은 항공유 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협조를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항공유 수입품 68.6%를 한국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미국 서부 지역(PADD 5)은 한국으로부터 85%를 수입하고 있다. 공급 차질 우려가 커지면 커질수록 시장의 시선이 한국 정유업계로 향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호주도 마찬가지다. 호주 외교부는 최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측에 석유제품 공급 지속을 확약받았다고 밝힌데 이어, 한국 정부와 '한국-호주 에너지자원 안보 공동성명'을 통해 경유, LNG(액화천연가스) 등 에너지 자원의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공급 유지에 대한 협력을 맺기도 했다.
호주 역시 자국 정유산업 쇠퇴로 석유제품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호주는 석유제품의 약 90%를 한국·일본·싱가포르·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국가에서 들여오고 있다. 한국은 호주의 최대 석유제품 공급국으로 전체 수입시장의 약 29.1%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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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유업계가 이같은 러브콜을 받는 배경에는 안정적인 생산·수출 역량이 자리잡고 있다. 국내 정유4사는 하루 약 337만배럴에 달하는 세계 5위권의 정제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단일 공장 기준 세계 5위권 내 3개가 국내 정유 정유사의 원유 정제공장이다. 대규모 설비는 비용을 낮추는 핵심 요인인 만큼 정제 능력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다.
특히 2007년부터 2024년까지 약 34조원을 투자해 갖춰놓은 아시아 최고 수준의 고도화 설비를 기반으로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수출하고 있다. 중동 사태 이후에는 비중동산 원유 도입 비중을 빠르게 확대하면서 석유류 공급망 안정화에도 주력하고 있다. 기존 중동산 중질유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홍해 인근 얀부항과 푸자이라항을 활용한 우회 조달에 나서는 동시에 미국산 경질유와 캐나다·에콰도르산 중질유 확보를 병행하고 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공급망 불확실성이 확대될수록 안정적인 생산과 공급 역량을 갖춘 정유사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며 "최근 중동사태를 계기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한국 정유업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