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미생' 팬들이 많다. 처음에는 "배우들 연기 좀 한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이젠 금요일 밤이면 공중파는 제쳐 놓고 미생만 본다고 한다. 평소 드라마를 즐겨 보지 않는 사람까지 미생은 챙겨본다고도 한다.
무엇이 이들을 미생 앞으로 불렀을까. 100만권 넘게 팔린 원작 만화의 유명세로 우연히 보기 시작해 이제는 "무슨 이런 드라마가 다 있나" 싶어 계속 본다는 것이 이들이 밝힌 속내다. 공중파가 미생 섭외 제1조건으로 제시했다는 닭살 돋는 애정 라인은 아예 걷어냈고, 직장인들의 하루하루를 제대로 녹였다.
그만큼 미생은 흥행 방정식의 허를 찌른다. 무엇보다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이 너무 평범하다(?). 장그래, 오상식, 김동식, 최전무 등은 내 옆 자리에도 한 명 정도는 있을 법한 캐릭터다.
드라마 첫 회를 보고 나서 지난해 10월 미생 윤태호 작가의 짧은 강연이 떠올랐다. 그는 당시 "만화의 캐릭터는 전지전능하기보다 한계가 뚜렷해야 재밌다"고 강조했다. 그러니 그의 만화에서 고졸 출신으로 프로 바둑기사에 실패하고, 어설픈 낙하산으로 입사한 장그래가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윤 작가는 "등장인물 한명 한명의 살아온 이력과 삶의 주요 사건들을 일목요연하게 엑셀로 정리하고, 다시 이를 토대로 서사를 짠다"고 했다. 그는 "인물들의 전체를 볼 수 있는 시각을 기르려고 애쓴다"고도 했다.
장그래는 특히 아픔이 많은 캐릭터다. 그는 '평생의 업'으로 삼고, 모든 것을 걸었던 프로 입단에 실패했고, 이것이 한으로 남은 남자다. 장그래가 사무실에서 잠깐 졸 때 자신이 프로 입단을 끝내 포기하는 악몽을 꾸며 한줄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그래서 더 인상적이다. 윤 작가의 장그래 캐릭터 엑셀 파일은 본 적 없지만 거기에 "정신적 외상에 시달린다"고 한 줄 적혀 있을 것 같다.
1970~80년대 일본 사회를 뒤흔든 만화 '내일의 죠'의 주인공도 사실 '전지전능'보다는 '우울'과 '가난'의 캐릭터다. 내일의 죠를 만든 콤비인 신문기자 출신의 가지와라 잇키와 순정만화 작가였던 지바 데쓰야는 소년원 출신의 죠를 통해 당시 서민 사회의 모순과 이를 극복하려는 희망을 보여준다.
나시르 가에미의 저서 '광기의 리더십'은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즉 제 정신이라고 해서 훌륭한 리더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 반대다"라고 적고 있다. 링컨이나 간디, 처칠, 케네디, 테드 터너 등도 정신적 아픔이 컸지만 되레 위기 때 현실을 냉철하게 파악하는 능력이나 공감 능력, 창의적 아이디어 등이 뛰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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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초반에 어려움을 겪지 않은 사람은 나중에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힘든 시기가 되면 쉽게 상처 받는다. 초반의 성공은 미래의 실패를 조장할 수 있다. 하지만 초반에 실패를 반복하면 미래에 착각하지 않고 더 냉정하게 현실을 인정한다. 미국의 대공황을 거쳤던 아이들이 성인기를 추적한 결과 어린 시절 힘든 과정을 더 많이 경험한 아이들이 심리적으로 더 강하게 성장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윤 작가는 또 다른 인터뷰에서 "버티는 것이 완생"이라고 했다. 만약 어느 순간까지 버틸 수 있다면 거기서 반드시 배우는 게 있다는 것이 완생을 꿈꾸는 미생의 교훈이다.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는 이 야생의 법칙은 미생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미생의 계약직 사원 장그래는 끝내 정규직 사원이 되지 못한 채 버티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장그래가 그것으로 끝이라고 믿지 않고 오상식이 세운 회사에서 더 잘 버틸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장그래는 끝까지 버티며 언젠가 완생이 될 것이다. 이 완생이 하루하루를 미생으로 살아가는 우리 서민들이 그리는 속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