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 70주년이 한 주 앞으로 다가오면서 떠오르는 기업가가 있다. 교보생명 창립자 신용호다. 신용호는 일제강점기 청년사업가로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동참했고 해방 후에는 대한교육보험(현 교보생명)을 세워 민족자본 형성에 매진했다. 마침 오늘은 교보생명이 출범한지 57돌을 맞이한 날이다.
신용호는 1917년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육남매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민족의식이 충만했던 아버지는 야학을 열고, 소작쟁의에 앞장서며 일제에 맞섰다. 맏형도 항일운동에 나서, 아버지와 형은 번갈아 옥고를 치렀다. 생활이 어려워 어머니가 하숙을 치며 생계를 맡았다.
신용호는 어려서 건강이 아주 나빴다.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 바람에 진학시기를 놓쳤고, 정규 교육은 끝내 받지 못했다. 독학을 해야 했다. 도서관이나 하숙생들에게 빌린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소년은 헬렌 켈러와 카네기를 존경했다. 건강 때문에 진학이 좌절됐기에 농맹아 최초로 대학 교육을 받은 헬렌 켈러에게 ‘도전정신’을 배웠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세계 최대 철강회사를 일군 앤드류 카네기는 소년에게 사업가의 꿈을 심어줬다.
신용호는 20세가 되자, 돈을 벌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 1940년 24살 나이에 베이징에 곡물회사 ‘북일공사’를 설립했다. 청년 신용호는 민족시인 이육사와 운명적으로 만나 사업을 통해 독립운동을 돕겠다는 마음을 전했다. 육사는 감격했다. ‘대사업가’가 되어 동포들을 구제하는 ‘민족자본가’가 될 것을 당부했다. 사업은 번창했다. 신용호는 기회가 올 때마다 육사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건넸다. 안타깝게도 육사는 해방을 앞둔 1944년 일제의 지하감옥에서 순국했다.
신용호는 육사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1958년 8월7일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형성’을 설립이념으로 ‘대한교육보험’을 세웠다. 세계 첫 ‘교육보험’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교육보험 혜택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해 경제성장의 주역이 됐다. 학부모들이 맡긴 돈은 ‘민족자본’이 되어, 도로, 항만 등 국가 기간산업 구축에 이용됐다.
보험 사업이 굳건히 자리를 잡자, 신용호는 일본 도쿄 기노쿠니야(紀伊國屋)나 산세이도(三省當) 서점보다 더 크고 좋은 서점을 만들고 싶었다. 1981년 서울 광화문 사옥 지하 1층에 단일층면적 세계 최대 서점인 교보문고를 열었다. 2003년에는 교보강남타워에 축구장 넓이 2배에 달하는 교보문고 강남점을 개장했다. 기업의 이윤추구가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신념이 작용했다.
신용호는 2001년 암으로 6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2년 후 교보강남타워의 준공과 교보문고 강남점 개장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는 강한 의지로 준공식을 넘긴 2003년 9월 눈을 감았다. 암 투병 당시 신용호는 아들 신창재(현 교보생명 회장)에게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겸손해야 한다. 아무쪼록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형성이라는 회사 창립 이념을 잊지 마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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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취재결과(7월13일자 본지 10면 참조) 신창재 회장의 장남은 현재 교보생명 자회사 KCA손해사정에서 평범한 대리로 근무중이다. 신창재는 (회사 직원들에게) “내 아들이라도 본인이 노력해서 객관적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조직장, 임원으로 성장한다면 미래 경영자 후보의 한사람이 될 수 있겠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기엔 지금은 너무 이른 시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교보생명을 교육진흥과 민족자본 형성을 위해 설립한 공익회사로 여겼던 창립자의 아들로선 당연한 생각일 것이다.
광복 70주년, 대산(大山) 신용호의 기업이념이 오늘은 더욱 크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