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는 세상]

민주주의 현대 정치사에서 '사과'(apology)에 유독 인색한 정치인을 들자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단연 첫 손에 꼽히지 않을까 싶다. '트럼프 2기' 들어 예외없이 투하한 경제 핵폭탄(상호관세)에 미국은 물론 전세계가 초토화되는데도 사과는커녕 도통 물러설 기미가 없으니 말이다. 첫 집권때인 '트럼프 1기'부터 이어진 숱한 막말과 기행이 문제가 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트럼프가 고개를 숙였다거나 진솔하게 사과했다는 뉴스를 찾기는 쉽지 않다.
정치인 트럼프가 딱 한 번 '사과' 대신 '유감'(regret)을 표했던 적은 있다. 2019년 10월 공화당 대선 후보 시절 유세 과정에서 자신의 유색인종 혐오 발언에 대해 "정말 후회한다"며 한 발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나는 항상 진실을 얘기한다"면서 유감 발언을 뒤집는 듯한 모순된 사족을 붙여 공분을 샀다. 사과의 대상과 주체가 불분명하고 진정성이 결여된 유감 표명이란 비판이 나왔다.
트럼프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국내 정치인들도 사과에 무척 서툰 편에 속한다. 돌이켜보면 느닷없는 비상계엄과 두 번째 현직 대통령 탄핵이라는 헌정사 비극 역시 '사과의 실종'에서 시작된 측면이 없지 않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7일 대국민 기자회견에서 명태균 의혹 등에 대해 두루뭉술한 말로 얼버무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자신의 집무실 책상 위 명패 문구처럼 "The bucks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라고 했다면 유례없는 헌정질서 위기를 자초하지 않았을 수 있다. '사과'가 정치 리더십의 명운을 좌우한 케이스는 이 외에도 국내외를 막론하고 차고 넘친다.
커뮤니케이션(소통) 전문가들은 신속성, 구체성, 진정성을 '사과'의 핵심 3원칙으로 꼽는다. 누구에게 무엇을 사과하는지 구체적이고 진솔하게 설명하고 시의적절하게 메시지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매사추세츠대학교 의과대학 총장을 지낸 아론 라자르 박사는 저서 '사과에 대하여'에서 사과를 하려면 "잘못을 인정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며, 후회를 표현하고 보상을 제안하라"고 썼다.
얼마전 오세훈 서울시장이 서울 강남권 토지거래허가구역을 해제했다가 35일 만에 확대 재지정하면서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토허제 해제 이후 들썩인 부동산 시장과 집값에 미칠 영향을 미리 가늠하지 못한 정책 실패에 대해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스럽다"며 머리를 숙였다. 실수요자 중심의 주택 거래를 유도하기 위해 자유 거래를 제한하는 토허제의 태생적 한계와 국내 부동산 시장의 다층적 변인을 감안하더라도 정책 실기와 오판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피해가긴 어려워 보인다.
다행스러운 건 조기 대선을 앞둔 유력 정치인으로서는 쉽지 않았을 신속한 사과와 책임 인정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강남을 중심으로 한 집값 상승세도 한 풀 꺽여 소강 상태라고 한다. 남은 건 재발 방지 대책이다. 부동산 정책 사전 검증체계를 강화하고 조직 전문성을 보강하는 후속 조치가 이어져야 사과의 진정성이 담보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