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대전이 끝나고 해방된 지 80년이 됐다.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의 원형이 남한에 자리잡기 시작한 때다. 최근 "광복은 제2차대전에서의 연합국 승리로 얻은 선물"이라는 발언이 논란이다. 이 발언이 '광복은 40여년 독립운동의 결실'이라는 점을 무시했다는 주장도 있다.
1943년 미국·영국·중국 수뇌가 발표한 카이로선언은 한국 독립을 최초로 선포한 의미가 있다. 이는 2년 후 포츠담에서 재차 확인됐고 전후질서 수립의 기본이 됐다. 카이로선언에 한국 독립이 포함된 데 대해 연합국의 선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선조들의 줄기찬 항일독립투쟁을 연합국이 인정한 성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국제질서라는 것이 연합국 수뇌가 모여 한 국가에 독립을 선물로 주는 것도 아니고 독립투쟁을 했다고 그 대가로 뭔가를 주는 거래의 장도 아니다. 전후질서를 논의하는 회담은 전쟁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다. 30년전쟁 이후 베스트팔렌조약이 그러하고 나폴레옹전쟁 이후 빈회의가 그러하다.
카이로에 미영중 수뇌가 모인 것도 마찬가지다. 일본이 다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조선문제도 그 하나였다. 논의된 가장 큰 주제는 일본의 영토를 언제 이전으로 축소할 것인가였다. 카이로회담이 2차대전의 전후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논리적으로 하자면 2차대전 직전으로 일본 영토를 축소하면 된다. 그런데 일본이 언제부터 2차대전에 참전했는지를 확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1937년에 이미 일본은 중국의 화북지역을 침공했고 그보다 앞선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병합했다. 일본은 1차대전에선 연합국으로 참전해 태평양에서 패퇴한 독일의 태평양 식민지들을 점령했다.
카이로에 모인 수뇌들이 내린 결론은 조선, 만주, 대만 등을 일본제국에서 영구히 분리하는 것이었다. 일본이 이들에 대한 지배권을 최초로 획득한 것은 1894년 청일전쟁 직후다. 그후 각종 전쟁을 거쳐 2차대전이 벌어졌는데 연합국 수뇌는 일본이 수십 년 전에 삼켜 소화가 거의 다 된 조선, 만주, 대만을 다 토하라는 것이었다. 조선이 일본 대륙침략의 발판이 되는 것을 쓰라리게 목도한 장제스의 의도도 작용했을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1894년 이후 전과를 모두 잃는 뼈아픈 결과지만 전쟁을 일으킨 대가는 냉혹했다.
카이로의 의도는 한국을 독립국으로 만들어 일본의 대륙침략을 저지하는 방패로 쓰자는 것이다. 한국의 격렬한 항일의식이 신생국의 정체성이 돼 일본의 대륙진출을 저지할 것이라 기대한 것이다. 이후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대륙의 공산주의가 일본으로 확산하는 것을 한국이 막아주는 것이었다. 식민지배·전쟁·분단의 아픔을 겪은 것도 지정학에서 비롯됐고 식민지에서 벗어난 것도 지정학이 준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유라시아와 태평양이 교차하는 교차로다. 대륙의 힘과 대양의 힘을 모두 발휘할 수 있는 레버리지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위치다. 이 힘을 발휘하기 위해 선결돼야 할 과제가 북한문제다. 2차 북미회담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