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들이 자꾸 선물세트처럼 한꺼번에 불려 다니는 거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듭니다." 한 재계 인사의 말이다. 최근 한미 무역협상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일정 곳곳에 재계 총수들이 잇따라 모습을 드러냈다. 관세 협상, 외교 행사, 투자 유치. 이럴 때마다 기업인들은 빠짐없이 호출된다.
물론 기업 입장에서도 얻을 건 있다. APEC이든 협상이든 국제무대 경험은 분명 자산이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넓히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 역시 기업의 몫이자 역할이다. 이들의 발걸음이 국익을 위한 뒷받침으로 이어진다면 환영할 일이다.
문제는 그 장면이 반복될수록 피로감도 쌓인다는 점이다. 기업들은 사업 현안이 쌓여 있는 상황에서 이벤트성 소환에 나설 때마다 '이번엔 또 무엇을 기대하나' 하는 시선을 보낸다. 정년 연장, 온실가스 감축 등 기업이 원치 않는 정책은 따로 추진하면서 외교 무대나 경기 부진 국면에서는 "투자를 늘려달라"는 주문이 되풀이된다. 정부가 기업을 필요로 할 때만 찾는 구조, 기업이 정부 정책에 지쳐가는 구조 속에서 진정한 협력은 어렵다.
지금은 글로벌 경제가 인공지능(AI)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시기다. 대미 투자 후속 조치, 공급망 안정, 신산업 경쟁력 확보 등 당면한 과제가 한둘이 아니다. 이런 때일수록 정부와 기업의 소통은 상시적이고 양방향이어야 한다. 외교 무대의 성과 못지않게 보이지 않는 정책 조율과 현장 의견 반영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기업들도 정부와의 소통에서 얻는 게 적지 않다. 해외 시장에서 정책 지원이 필요한 경우가 많고, 각종 규제나 세제 문제도 협의를 통해 풀 수 있다.
정부가 기업을 찾을 때 기업도 정부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위기 때만 동원되는 관계가 아니라, 평시에도 함께 방향을 조율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정치적 무대에서 기업인을 세우는 대신 산업 현장에서 해법을 찾는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부가 기업인들을 '경제 외교의 소품'처럼 활용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은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 정치적 필요가 아니라 신뢰 위에서 정부와 기업이 양립할 때 '동원'이 아닌 '동행'이라는 말이 비로소 어울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