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에 시작이 있다면 끝도 있어야 한다. 흥미진진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화자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live happily ever after)라며 책을 덮는 동화적 엔딩은 사실 주인공의 앞날에 펼쳐질 진짜 '행복'과는 별 상관이 없다. 그것은 오히려 '그 이후'의 일은 독자가 궁금해할 필요가 없으니 이제 그만 현실로 돌아가 일상을 살아가라는 작별인사에 가깝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이나 눈부신 영웅 서사라도 끝없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삶과 다를 바 없어진다. 유한함이 선사하는 마침표, 그것이 이야기가 비루한 현실을 구원하고 서사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물론 이야기의 끝 이후에도 새로운 상상은 이어질 수 있다.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천일야화의 천두번째 이야기'가 그 예다. 이 소설에는 '천이일째 밤'에도 이야기를 이어가는 세헤라자데가 등장한다. 그녀는 왕에게 미래의 기괴한 풍경들을 들려주는데 '쇠로 된 몸에 액체 불의 피를 가진 괴물이 대양을 달려가는 모습'(증기기관선) '지구 반대편에서도 들을 수 있는 목소리와 대륙 건너편에 소식을 전하는 보이지 않는 팔'(전보) '태양 빛으로 초상을 그려내는 장치'(카메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 기묘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왕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거짓말"이라 분노하고 끝내 그녀를 처형해 버린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세헤라자데가 묘사한 풍경은 바로 포가 해당 작품을 쓴 19세기 중반에 막 발명돼 나온 신문물들이었다. '천일야화'가 대략 9세기부터 14세기에 걸쳐 완성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포의 세헤라자데는 다가올 '미래'를 생생하게 증언한 셈이다. 포는 당대 독자들에게 과거 사람들이 차마 상상도 하지 못한 경이로운 미래가 바로 그들의 '현재'라는 반전을 선사한다. 지식과 기술발달이 관점에 따라 환상적인 장밋빛일 수도, 이해 불가능한 공포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 갈림길에서 우리는 포의 '리메이크'를 일종의 장르실험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천일야화' 속 세헤라자데의 이야기가 초자연적 요소가 가미된 '판타지'라면 '천일야화의 천두번째 이야기'에서 그녀는 일종의 SF(공상과학소설) 작가인 것이다. 판타지는 비합리적인 초월적 세계로 뻗어가지만 SF는 설령 가설일지라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설명 위에 그 세계를 구축한다. 포가 수십 개 각주까지 달아가며 세헤라자데의 이야기에 근거를 제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그 각주 모두가 보이는 것처럼 완전한 과학적 증명은 아니다. 하늘을 나는 양탄자나 요술램프에는 환호한 왕이 근대적 진보의 결과물들엔 말도 안 된다며 거부하는 것을 교묘히 풍자하기 위한 위장물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SF는 허황된 상상을 배제하고 철저한 논리로 현실성을 추구하지만 현실을 현실로 인식하는 데도 때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미래에 대한 상상은 시간이라는 거대한 파도 위에서 불안을 느끼는 '현재'의 모습인 경우도 적지 않다. 대부분 공상과학소설이 진보된 미래의 외양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한계가 그대로 반복되는 디스토피아로 귀결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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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을 거스르는 도시나 의식을 데이터로 치환한 신인류의 등장처럼 SF는 치밀한 사고실험으로 도출된 낯선 세계로 우리를 매혹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재 우리가 마주하는 소외와 결핍, 억압의 오래된 갈등구조를 가진 서사를 반복하는 것이다. 문화이론가 프레데릭 제임슨의 말처럼 SF는 오늘의 불안이 가장 먼 곳까지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모습에 다름 아니다.
포의 '천두번째 이야기'는 신기술에 환호하는 근대문화에 대한 비판이자 현실과 상상 사이의 위장된 관계를 꼬집는 날카로운 자기전복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과거의 상상과 현실을 비교하며 우리의 '오늘'을 풍요롭게 경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