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고용노동관계는 법과 제도, 노사 주체의 의식, 현장의 관행이 얽혀 경로의존성을 가지며 형성된 하나의 시스템이다. 시스템이란 일반적으로 외부 환경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위 구성요소 간의 상호의존을 통해 균형을 추구하는 체계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수출주도형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대기업 중심 가치사슬과 다단계 하청, 그리고 자영업 과잉구조를 이 시스템의 골격으로 삼았다. 그러나 인구절벽과 디지털 전환, 글로벌 경쟁의 격화가 동시에 밀려오는 지금 과거의 경로에 계속 머무르는 것은 더이상 선택이 아니라 구조적 위험이다.
한국은 전형적인 소규모 개방경제로 수출과 글로벌 가치사슬 의존도가 매우 높다. 소수 대기업이 상층부에서 높은 생산성과 임금을 누리고 그 아래로 중소·하청기업과 자영업, 플랫폼 노동이 촘촘하게 깔린 구조다. 이는 과거엔 성장의 동력이었지만 지금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고착시킨 요인이다. 대기업 노동자는 소수지만 임금·복지에서 큰 격차를 보이고 중소기업 임금은 대기업의 60% 수준에 그친다. 고령층 중심 자영업 비중이 OECD 상위권을 유지하며 상당수가 최저임금 수준에 머문다는 사실은 우리 시스템의 취약성을 드러낸다.
문제는 이런 구조가 기술혁명과 인구변화 속에서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AI와 데이터경제는 단순 저임금 노동이 아니라 혁신역량과 이해관계자의 협력에서 경쟁력을 찾는다. 자동화로 일자리의 성격이 급변하는 전환기에 특정 고용형태만 고수하는 전략은 한계가 분명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가 언제든 새로운 직무로 이동할 수 있는 '고용가능성'(Employability)을 어떻게 제도적으로 보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는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경쟁력의 문제다.
덴마크의 '유연안정성' 모델은 한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 느슨한 해고규제와 두터운 실업급여,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결합해 기업에는 유연성을, 노동자에게는 전환의 기회를 제공한다. 한국도 경직성 완화논쟁을 넘어 '안전한 이동'을 뒷받침하는 인프라 구축으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산업전환이 불가피한 영역부터 '전환협약'을 체결해 전직·재교육 패키지를 설계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다만 사회적 신뢰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은 우리의 현실을 감안해 권리와 책임이 균형을 이루는 한국형 모델을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
오는 3월 시행을 앞둔 노조법 개정안은 이중구조 시정이라는 상징성이 있다. 그러나 '힘의 재분배'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또 다른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기업별 노조 중심 구조에서 조직된 노동의 교섭력만 강화되고 비조직 노동자가 주변화한다면 개혁의 정당성은 흔들릴 수 있다. 제도변화는 힘의 균형만이 아니라 책임과 신뢰의 균형까지 함께 설계돼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4가지 조건을 갖춘 새로운 사회계약을 설계해야 한다. 첫째, 유연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높여야 한다.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투자를 확대해 전환의 충격을 사회가 분담해야 한다. 둘째, 협상의 단위를 기업에서 산업·지역단위로 격상해야 한다. 원·하청이 함께 참여하는 협의체로 납품단가와 노동조건을 연계논의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셋째, 사회보장체계를 '보편적 노동시민권'으로 확장해야 한다. 플랫폼 노동자와 프리랜서까지 포괄하는 안전망 없이는 보호의 격차를 해소할 수 없다. 넷째, 사회적 대화기구의 실질화를 통해 신뢰의 인프라를 재건해야 한다. 주요 제도의 변화는 반드시 사회적 공감대를 거쳐 추진돼야 한다.
결국 과제는 '제2의 사회적 계약'을 통해 패러다임을 재설계할 것인가 하는 선택이다. 협력은 생존의 조건이다. 새로운 고용노동관계는 노와 사 그리고 공동체 전체의 번영을 위한 최소한의 인프라다. 협력시스템 설계를 위한 선택의 시간은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