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통령, 전세 사라질 것이라고 했지만
비효율적 공공주도 임대주택은 대안 못돼
주거안정 바란다면 공공·민간 역할 구분을

형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인근 소도시 상고에 진학하자 부모님은 자취를 하라고 사글셋방을 얻어줬다. 연탄 아궁이와 석유풍로(곤로)가 놓인 부엌이 딸린 방이었다. 1980년대 후반 임차료는 10개월치를 끊어 선납하는 관행이 있었다. 열 달 세가 30만원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따로 보증금은 없었다.
전세라는 게 있다는 것은 서울 생활을 하면서 처음 듣게 됐다. 돈을 맡기면 이사를 나갈 때는 고스란히 돌려받을 수 있다니. 보증금의 이자만큼 세를 받는 거나 다름없다는 것은 경제 관념이 잡힌 뒤에야 알았다.
전세는 부동산을 기반으로 한 금융이다. 사금융이자 관습금융이다. 집주인은 세입자에게 주택을 매개로 거액의 목돈을 빌리고 이자 대신 주거권을 부여한다.
1990년대 초만 해도 전세는 서울 등 대도시에서만 볼 수 있었다. 지방에도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고서야 점차 전국으로 확산했다. 전세에는 집값 상승을 부추긴 장본인이라는 낙인이 찍혔지만 오히려 집값이 빨리 상승했기에 전세가 번성했다고 봐야 한다. 매매 시세보다 적은 돈을 받고 집을 임대하는 것이니, 집값이 그 차액의 이자비용 이상으로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이 뒷받침돼야 한다.
산업화 시기 이촌향도가 가속되며 서울 주택난이 심화했다. 민간 자금을 주택 시장으로 끌어오기 위해선 전세만 한 게 없었다. 집주인이 곧 임대주택 공급자였다. 집주인이 기대하는 것은 주택가격 상승에 따른 자본이득이다. 투자든 투기든 이익을 볼 것이라는 기대에서 출발한다. 집값이 오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세금과 수선비까지 부담하면서 자금을 묶어둘 이유가 없다.
전세가 월세보다 내 집 마련에 유리하다는 통념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보증금의 기회비용에, 나중에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리스크까지 고려해야 한다. 전세는 '주거 사다리'나 '주거 징검다리'로 불린다. 단단한 계단이나 돌다리로 불리지 않는다. 사다리는 바람에 넘어지고 징검다리는 홍수에 떠내려간다. 경찰이 특별단속을 시작한 2022년 7월부터 올해 8월까지 전세사기 피해자는 2만7912명, 피해액은 4조781억원에 달한다. 전세보증금은 통계에 잘 잡히지 않는 숨겨진 가계부채, 그것도 사채이다. 주택담보대출과 함께 언제든 경제안정을 해칠 수 있는 시한폭탄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전세가 장기적으로 축소되고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을 소개했다. 전세 감소를 유도하는 실거주 중심의 금융·세제 정책도 폈다. 실제로 전세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친목계와 같은 사금융의 운명을 따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민들에게 충분한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갑작스러운 변화는 주거 불안을 키운다. 이 대통령은 2028년을 넘어 주택공급이 '정상화'할 것이라고 했는데, 공급이 '비정상적'인 지금은 최악의 타이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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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가 시장에서 사라지려면 시세차익 기대가 봉쇄되거나, 친목계가 제도권 금융제도인 적금에 역할을 내줬듯 주거 수요를 뒷받침할 대안이 건실해야 한다. 세금과 규제를 통해 주택매매 차익 기대를 꺾으려는 시도는 한계가 있다. 정책은 권력과 이해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에 항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격을 수요와 공급이 결정한다면 주거수요를 뒷받침할 대안은 무엇인가. 정부는 공공임대를 제시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LH의 임대주택 운영손실은 지난해 2조7734억 원으로 해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사회안전망으로서 공공임대가 필요하지만, 광범위한 중산층 수요까지 떠맡는 것은 다른 문제다. 비효율성과 관료주의가 숙명인 공공주도로 국가가 목표로 해야 할 국토의 효율적 운영을 달성하지 못한다.
전세가 시대의 유물이라고 하면서 시대착오적인 공공 만능주의를 소환하는 것은 난센스다. 임대주택을 늘려야 한다면 과거 민간의 자발적 금융인 전세제도가 주택난 해소에 일조했듯, 포스트 전세 시대도 민간 자본의 역할을 존중해야 한다. 시세차익보다 안정적인 임대수익을 추구하는 사업자를 육성하고, 중산층 세입자도 장기 거주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하자. 공공의 몫과 민간의 몫을 구분해 각자 잘하는 일을 맡기는 것이 새로운 시대를 대비하는 시작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