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故 김근태 고문의 고문(拷問)을 생각하며

[기고] 故 김근태 고문의 고문(拷問)을 생각하며

뉴스1 제공
2012.01.04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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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효 한국외교협회 정책위원  News1
최병효 한국외교협회 정책위원 News1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젊은 시절에 겪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하여, 임진년 새해를 이틀 앞두고 64세의 아까운 나이에 저 세상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니 우리나라에서는 참 보기 드문 아까운 정치인을 잃었다는 아쉬움이 크다.

한편으론 그 분이 고문을 당했던 1985년 9월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되돌아보게 된다.

어려운 시절, 그래도 젊음의 낭만을 못 이겨서 그 앞을 흐르던 실개천을 세느강이라고, 그 위의 볼품 없는 다리를 '미라보' 라고 불렀던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는 그러나 1960년대 말 부터는 봄마다 최루탄 가스와 라일락 향기가 뒤섞이고, 가을에는 마로니에와 은행잎도 독한 가스에 몸살을 앓아야 하는, 지성과 독재의 살벌함이 충돌하는 최일선이 되어 있었다.

교양학부를 공릉동 시골의 공대 캠퍼스에서 폭풍전야처럼 조용히 마치고 동숭동에서 시작한 본과 생활은 졸업 때 까지 학내 시위로 인하여 매학기 두달 이상 강의가 진행된 적은 없었다.

그런 분위기 하에서 독재정권하의 공무원이 되겠다고 시험 공부를 하는 것은 민주화 열기에 대한 불경으로 인식되었기에 당시 문리대의 많은 학생들은 말 못할 번민의 세월들을 보내야 했다.

외교관 하겠다고 대학에 들어왔으니 정부에 들어가야 되는데 그러면 결국 박정희 정권의 하수인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려웠었다.

지금 생각하면 사무관이 대단한 직위도 아니고, 박정희체제가 대한민국보다 더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니 그렇게 고민할 일도 아니었겠지만 당시의 어린 마음들은 그러하였다.

그래서 일찌감치 현실적 결정을 하고 시험 준비를 하는 친구들은 남이 알까 봐 눈치 채지 않게 몰래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부한 것도 없이 졸업장만 타면 뭐 하냐, 외국 유학 갈 형편도 안 되는 처지에 취직은 해야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 4학년에 들어서면서 모두에게 압박감으로 느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직을 맡아 국가에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하겠다고 대학에 들어 왔는데, 아무리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도 돈 때문에 어디 취직한다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4학년 1학기를 마치며 결국 국가고시를 보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는 분위기가 친구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조성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벼락치기 공부로 다행히 다음 해에 시험에 합격하고, 군대 마치고 1974년에 외무부에 들어가서 여권업무, 통상업무를 하다 보니 유신시절이라지만 심적 갈등은 거의 없이 지냈다. 그러나 재외공관에 나가 보니 사정이 좀 다른 점이 있었다.

소위 유신체제의 정당성을 해외 각국과 언론에 홍보하라는 지시가 수시로 떨어지고 주재국 언론에 유신체제 비판 기사가 나면 공관장이 혼이 났다.

북한 견제 업무와 유신홍보가 정무(political affairs) 업무의 중요 부분이었고, 공관장이나 공관원들이 이를 충실히 이행하는가를 점검하니 외무부 출신들의 심적 고통과 갈등이 심각하였다.

당시 외무부 출신들은 태반이 속으로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입장이라 유신홍보라는 것을 형식적으로 하고 결과 보고도 허위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정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사후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국보위라는 것이 들어서고 전두환 정권이 등장했는데 또 그 정권의 정당성을 각국 정부와 해외 언론에 이해시키라는 지시에 전 재외공관이 시달리게 되었다.

이런 지시에 의문을 제기한 직원들은 반정부로 낙인 찍혀 해직되기도 하였다. '외무부 직원들은 정부에 불만이 많다든데 싫으면 모두 그만둬라, 늬들 말고도 오겠다는 놈들이 중앙청 앞에서 청와대까지 줄서 있다'고 대통령이 외무장관에게 호통을 쳤다고도 하였다.

1984년 봄, 세 번째 해외 근무 차 런던에 1등 서기관으로 가서 정무 일을 보게 되었다. 외무부 생활 10년, 30대 중반의 과장급으로 공관의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할 위치였다.

그런데 런던에 본부가 있는 비정부기구(NGO)인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본부와 영국 각지의 그 회원들이 한국 정부의 반민주적 행태, 인권 탄압 등을 비난하는 서한을 매일 대사관에 보내오고, 우리 집에까지 항의 서한이 오곤 하였다.

이를 절차에 따라 서울 법무부에 요약해서 보고하고 어떻게 답변해야 되는지를 문의하면, 법무부에서는 한국 정부는 민주적 절차로 선출된 정권이고 정치적 탄압이나 인권 유린 등은 없으니 영국 정부나 'The Times', 'The Guardian' 등 언론에 잘 납득시켜서 비판 기사가 나오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가 오곤했다.

그래서 가끔씩은 국제사면위에 그런 식으로 형식적인 답변 서한을 보냈다. 그런데 영국 정부는 그렇다 치고, 국제사면위원회나 언론에 그런 식으로는 납득이 될 리 없으니 달리 무슨 좋은 방안이 없겠는지 대사에게 여쭤봤다.

대사는 본인도 많이 당하는 일이고 어차피 대통령에 의해 정치적으로 임명되었으니 선두에 서서 이를 옹호해야 하는 처지였는데 여러 가지로 고민해 온 듯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

즉 영국 사람들이 한국이 민주국가가 아니라고 비판하면 부정하지 말고 그게 사실이라고 인정하라고 했다.

그리고 '당신들은 민주주의 하는데 몇 년 걸렸느냐, 수 백 년 걸리지 않았느냐. 한국은 1948년부터 민주주의 시작하였으니 아직 40년도 채 안되고 매우 미숙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또 북한의 공산주의와 맞서다 보니 인권보호 분야에서도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러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좀 기다려 달라'는 식으로 대응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국제사면위 사람들하고 직접 만나서 그런 식으로 설명하면 연례 국별 인권보고서에서도 한국을 그렇게 나쁘게 만은 묘사하지 않지 않겠느냐며 노력해 보라고 했다. 정부의 지시대로 막무가내로 우리는 민주국가다, 인권 탄압은 없다고 앵무새같이 북한 외교관처럼 행동하는 것보다는 양심상 편할 것 같기도 하였다.

그래서 처음으로 국제사면위 런던본부와 직접 접촉을 갖게 되었다.

대사관의 정무참사관과 내가 국제사면위 사무총장이던 미국 하버드대 출신의 변호사와 그 아래 벨기에 출신 여성인 아시아·태평양 국장과 만나게 되었다.

우선 오찬에 초청하며 당신들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 얘기해 보자고 했더니 응해왔다.

그들은 우리의 설명에 감사하지만 인권이나 민주주의는 먹고 사는 문제나 국가안보 등 다른 어떤 이유로도 제약되어서는 안된다는 기본 입장에 따라 대응하였다.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다시 정부에 보고하였다. 그 후 그들도 자신들의 원칙에 따라 우리를 상응하게 오찬에 초대하면서 가끔씩 오찬 회동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985년 말부터 김근태 옥중 고문 사실이 국제사면위에 알려져 그의 석방과 고문 진상규명이 그들의 주요 투쟁 대상이 되었다.

국제사면위 측에서는 우리에게 사실 여부를 물었고 우리는 법무부에 김근태 고문에 대한 항의가 빗발치는데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수차례 문의하였다.

법무부 답변은 천편일률적으로 사실 무근이니 그렇게 설명하고 납득시켜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매일 쌓이는 항의 편지들의 요지를 모아 가끔씩 정부에 보고하고 어떻게 답변할 것인지를 매번 문의하니 법무부로서는 '대사관 놈들이 나가서 뭐 하는 거야, 어느 편이야'하는 기분도 있었겠지만 공문으로 물으니 공문으로 그렇게 매번 답장이 왔다.

고문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뻔한 일인데 사실 무근이니 너희들이 책임지고 국제 여론이 나빠지지 않도록 하라는 식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은 자기들이 저지르고 책임은 재외공관에서 지라는 식이니 말이다.

영국 언론들의 김근태씨 고문에 대한 비판도 거세고 해서 대사와 대책을 상의하였다.

‘우리 정부에서는 고문이 없었다고 하는데 국제사면위 조사단이 원하는 대로 한국에 가서 김근태씨를 직접 감옥에서 면담하도록 하면 되지 않겠느냐, 서울에 건의하도록 하자’고 하였다.

대사도 계속 시달리느니 결자해지가 좋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러자고 했다.

그래서 국제사면위 조사단을 받아들여 고문이 없었음을 서울에서 직접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요지의 공문을 법무부에 보냈다. 한두 번 건의해도 회신이 없어 계속 건의하였다.

고문이 없었다고 주장해온 터에 조사단을 안 받아들이면 이상할 것 같았는지 결국 이를 받아들이겠다는 회신이 왔다.

고문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무슨 배짱이지 하는 걱정도 들고, 차제에 고문 사실이 확인되면 고문 근절의 계기가 될 테니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후유증은 우리 대사관에서 지게 될 텐데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고문이 없었다는 것이 정부 입장이고 이를 믿고 조사단 접수를 건의한 대사관을 문책할 수는 없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국제사면위 측에서는 자신들의 주장대로 김근태의 옥중 면회가 허용되었다는 소식을 반신반의하면서 이를 주선해줘서 고맙다고 하였다.

그 동안 서로 인간적인 신뢰가 쌓였기에 상호 접촉 시 적대적인 분위기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당시 우리 국내 분위기상으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국제사면위 본부에서 아태국장과 한국담당관이 한국에 가서 김근태씨를 감옥으로 방문하여 면담하고 돌아왔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국제사면위 관계자의 한국 정치범, 양심수 면담은 그렇게 실현되었었다.

김근태씨를 면담하고 돌아온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옆에 교도관등이 있어 김근태씨가 제대로 말을 못했지만 그의 발뒤꿈치 등에 고문 흔적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래도 그러한 면담을 허용한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한국 실정에 대한 이해도 어느 정도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연례보고서 작성 시 너무 심하게 한국을 비판하지는 말아 달라고 했더니 전에 비해 약간 논조가 누그러지기도 하였다. 나름대로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 것이 외교관으로서의 애국적인 행동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외교론에 관한 고전인 영국의 외교관, 정치인, 언론인, 작가였던 Harold Nicolson의 명저 'Diplomacy'에서는 외교관의 7대 덕목(virtues)으로 '진실성, 정확성, 인내심, 침착성, 좋은 성품, 겸손, 충성심'(truthfulness, precision, perseverance, calm, good temper, modesty, loyalty)을 드는데 세월이 갈수록 충성심이 제일 중요한 덕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그 충성심이란 것이 무엇에 대한 충성이냐는 것이다.

민주국가에서는 별로 갈등이 생길 요소가 아니나 독재정권 하의 외교관에게는 매우 힘든 단어다.

그것은 분명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어야 하는데, 정부 자체가 반국가적(반민주, 반인권)이라면 어디에 충성해야 되는가?

외국에 나가 있는 외교관이 자신의 정치적 판단으로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행위를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가? 그것은 결국 망명으로 이어지게 될 것인데, 이를 충성심의 발로로 봐야 되는가?

유신독재와 그 후의 군사정부 시절에 해외에서 망명한 우리 외교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극소수였다.

참고 지나면 결국 민주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일성, 김정일 전제군주 체제하에서 망명한 북한 외교관은 좀 더 많으나 그리 큰 숫자는 아니다. 가족들을 평양에 인질로 잡고 있기 때문이다.

평시인데도 정부에 대한 충성심과 양심의 충돌 때문에 희생되거나 목숨을 바쳐야 하는 국가의 외교관들은 불행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상당한 수준으로 민주화된 대한민국 정부 하에서 근무하는 우리 외교관이나 공직자들은 행복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불필요한 양심의 갈등 없이 떳떳하게 교섭에 임하고 자신들의 실력을 키우는 일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최병효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주 LA 총영사, 주 노르웨이 대사 역임

-현 한국외교협회 정책위원 겸 우석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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