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300] [한국판 CSI법]

경찰의 초동수사 부실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사망 원인이 '영구미제'로 남겨졌다. 이 같은 상황이 재발하는걸 막기 위해 변사 사건을 맡을 검시 전문가를 확충하고, 검시 대상의 기준을 명확히 하는 이른바 '한국판 CSI(과학수사대)법'이 입법 추진된다.
3일 국회에 따르면 박인숙 새누리당 의원은 이르면 조만간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할 계획이다.
박 의원은 "우리나라 검시 제도에 미비한 점이 많다"며 "적어도 억울한 죽음이 의심될 수 있는 특정한 상황에서 만큼은 법의학적 검시가 의무적으로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검시 대상의 기준을 법률에 명시하는 것은 경찰이 신고 직후 자의적 판단에 따라 변사체를 단순 행정 처리키로 함에 따라 유 전 회장 사태처럼 중요한 사건이 묻히는 문제를 막기 위함이다.
법의학적 전문지식을 갖춘 등 검시 전문 인력을 확충하려는 것 역시 검시 전문가 부족이 이 같은 문제를 초래했다는 문제 의식에 따른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검시에 전문성을 가진 법의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소속 23명을 포함해 50여명에 불과하다. 인구 100만명 당 법의관이 1인 뿐인 셈이다. 반면 검시 제도가 발달된 미국에서는 인구 15만명당 법의관 1명 꼴이다.
박종태 대한법의학회 회장은 "법의학자 수가 크게 부족한 만큼 현실적으로 일단 몇몇 지역부터 점진적으로 인원 늘리는 방식으로 가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2005년부터 도입한 경찰검시관을 기존 67명에서 144명으로 증원할 계획이지만 이 역시 근본적인 처방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임상병리학, 간호학 등 법의학 비전공자들이 채용되는 경우가 많아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점에서다.
이숭덕 서울의대 법의학교실 교수는 "현장성, 전문성, 독립성 등이 검시 제도와 관련된 주요 문제인데 수사기관과 관련되지 않은 전문가들의 참여가 필요하다"며 "독립성은 검찰과 경찰 간 힘겨루기와 연관될 수 있어 복잡할 수 있지만 전문성과 현장성을 강화하는 것은 당장 추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병언, 버려진 진실···CSI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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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매미의 한 고급 저택. 벤처 창업으로 떼돈을 번 미혼 남성이 수영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과학수사대(CSI)가 신고 즉시 출동해 시신을 수습하고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다. 그날 수영장에 드나든 사람은 피해자 뿐.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그러나 CSI가 부검과 현장 감식을 통해 '사람'의 소행이 아님을 밝혀낸다. CSI는 수영장 옆 정원에서 악어의 발자국을 찾아낸다. 그리고 누군가 고기로 악어를 유인한 것을 알아내고, 결국 범인을 잡는 데 성공한다. (미국 드라마 'CSI 마이애미'의 한 에피소드)
# 6월12일, 전남 순천시 서면 한 매실밭. 변사체가 발견됐다는 신고를 받고 순천경찰서 초동수사반이 현장으로 출동했다. 시신 주변에는 구원파 계열사가 제조한 '스쿠알렌' 병과 '꿈 같은 사랑'이라는 문구가 적힌 가방이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시신을 단순 행려병자로 판단, '시신을 부검하고 행정처리 하겠다'며 검찰에 지휘를 요청했다.
'세월호' 선사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인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사인은 결국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게 됐다. 시신은 이미 심각하게 부패됐고, 현장은 이미 훼손됐다. 드라마 속 '해결사' CSI는 그곳에 없었다. 만약 전문 검시관들이 신고 직후 현장이 훼손되기 전 투입됐더라면 어땠을까?
미국, 영국처럼 전문 검시관이 사건 초기부터 사체와 현장에 대한 검시를 직접 담당하게 하는 '전담 검시제' 도입 방안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종태 대한법의학회장은 25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유 전 회장 사체 부검결과 발표장에서 "현장에는 경찰만 있었고 경찰의 시각으로만 시신을 확인했다. 만약 법의학자나 또 다른 사람들이 현장에 갔다면 또 다른 의견이 개진될 수 있었다"며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런 검시제도가 없다"고 말했다.
같은 자리에서 강승범 카톨릭의과대학 교수는 "사인은 시체 부검을 통해서만 밝혀지는 것이 아니다. 범인의 행적과 현장이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며 "현장에 있는 시신을 잘 관찰함으로써 사인을 밝히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데 불행히도 이번 사건은 현장 판단이 없어 사인 규명에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현행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변사체에 대한 '검시' 책임자는 검사로 명시돼 있다. 그러나 변사 사건의 수에 비해 검사의 인력이 부족해 실제로는 경찰이 검시를 대신 담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변사체가 발견되면 통상 경찰의 초동수사반이 현장을 확인하고 1차적 판단을 내린 뒤 검찰에 수사 지휘를 요청한다. 문제는 경찰 초동수사반에 대개 전문 검시관이 포함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인 등을 밝히는 데 핵심적인 증거가 될 수 있는 현장의 특징이 비전문가들에 의해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돼 훼손되는 사례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반면 미국은 경찰서마다 CSI로 불리는 '현장 범죄감식반'을 두고 사체 발견시 이들이 가장 먼저 현장감식에 들어간다. CSI가 도착하기 전에는 경찰 가운데 누구도 현장에 손을 댈 수 없다.
이는 우리나라와 미국의 검시 제도 차이에 기인한다. 우리나라는 별도의 전문 검시관이 아닌 경찰이 검시까지 직접 맡는 '겸임 검시제'를 따르고 있다. 반면 미국은 일반 경찰이 아닌 법의학 전문가들이 검시를 전담하는 '전담 검시제'를 채택하고 있다.
'과학수사대' CSI···미국와 우리나라 차이점은?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정확한 사인이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영구미제'로 남겨진 가운데 경찰의 부실한 초동 '검시'(檢視)가 그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우리나라와 해외의 검시 제도에 관심이 모아진다.
'검시'란 변사 등 사망 사건에서 사체 뿐 아니라 현장상황 등을 조사, 사망 원인을 비롯해 사망 시점 및 장소 등을 밝혀내는 것을 말한다.
검시 제도는 크게 '겸임 검시제'와 '전담 검시제' 등 2가지로 나뉜다.
겸임 검시제는 별도의 전문 검시관이 아닌 경찰 등 수사당국이 검시 업무를 겸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가 바로 이 제도를 취하고 있다. 변사체 발견되면 경찰의 초동수사반이 기초적인 검시를 맡는다. 대개 일본, 독일 등 주요 유럽국가들처럼 '대륙법' 체계를 가진 나라들이 겸임 검시제를 택하고 있다.
겸임 검시제는 수사를 담당하는 검찰이나 경찰이 직접 검시부터 모든 수사 과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사건을 통합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검시의 전문성이 떨어져 부검 등 보다 정밀한 조사가 필요한 사체를 단순 처리해버릴 우려가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우리나라는 이 같은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경찰청에서 의학 또는 보건학 관련 학위 및 경력 소지자를 특채해 검시관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다. 독자적인 수사 권한이 없어 경찰 등의 수사를 보조하는 역할에만 그친다는 점에서다.
반면 미국, 영국 등 '영미법' 체계를 따르는 나라들은 주로 전담 검시제를 운영하고 있다. 일반 경찰이 아닌 법의학 전문가들이 검시를 전담하는 방식이다.
미국의 경찰서마다 설치된 '과학수사대'(CSI)가 바로 그 예다. 사체가 발견되면 즉시 CSI가 출동해 현장감식부터 부검, 심지어 수사까지 모든 과정을 통합해서 수행한다. 의사 자격증 소지자 등 '법의관'(Medical Examiner·ME)들이 중심이 되고 조사관들이 이를 보좌한다. 이를 통해 미국은 검시의 4대 요건인 통합성, 전문성, 신속성, 독립성을 모두 충족시키고 있다.
한편 대한법의학회는 미국 등의 '법의관' 제도를 참고해 '법의학회 인정의'를 육성하고 이들이 현장에서 '검시의'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보고도 못 알아본 '유병언 시신'···경찰 생각은?

초동수사 실패로 사인 판명이 불가능해진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73)의 시신을 놓고 경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전문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현행 검시 제도는 자연사나 일반 병사를 다루는 '행정검시'와 범죄 혐의가 의심되는 변사에 대한 '사법검시'로 구분된다. 행정검시가 일반 죽음을 경찰이 확인해 유가족에게 시신을 인계해주는 것이라면 사법검시는 죽음에 대한 범죄 연관성을 밝히는 조사다. 검시 주체는 검찰이고, 경찰은 이를 위임받아 조사할 수 있다.
유 전 회장의 시신이 신고된 직후 경찰은 유 전 회장과 시신과의 연관성을 알아보지 못한 채 '단순 행려병자'로 행정검시 절차를 진행했다.
시신 발견 장소가 유 회장이 은신하던 별장 근처인 점이나 그가 입고 있던 복장 등이 고가 의류였다는 점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특히 사체에 금니가 10개 있었다는 점이 간과된 것은 초기 검시 실패의 대표적인 대목이라고 지적받는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은 초기 검시 당시 법의학 전문 검시관 등이 현장에 투입되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변사 사건은 매해 2만5000여건 안팎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인 규명 등에 전문성을 가진 법의학 전문 인력은 소수에 그친다. 국과수 소속 검시의 23명을 비롯해 국과수 퇴직의와 학계 전문가 등이 전부다. 때문에 대부분의 변사체는 경찰이나 경찰에 의뢰 받은 민간 의사들의 검안을 받고, 일부만 국과수로 넘겨진다.
경찰은 검시 강화를 위한 '경찰검시관' 제도를 2005년부터 운영 중이다. 병리학 및 간호학 등 관련 전공자를 뽑아 국과수 교육을 받게 한 후 현장 검시에 참여하게 하는 제도다. 그러나 이들 역시 법의학 전문가들에 비해 의학 지식이 부족할 뿐 아니라 마찬가지로 인력 또한 부족하다.
서울 소재 경찰서의 일선 형사과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변사 사건이 많은 편인데 이를 정확히 판별할 수 있는 법의학 전문가와 국과수 요원이 부족해 투입되지 않는게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현재 각 지방경찰청에서 검시 전문요원을 운영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2~3명 안팎에 그치는 게 보통"이라며 "중요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사건이 겹쳐 검시관 투입에 2~3시간이 소요되기도 한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검시관 제도 보완을 위해 전문 인력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지만 예산 마련이 어렵거나 효율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며 "경찰서 2~3곳을 묶거나 지방의 경우 '군' 단위 수준으로 전문 인력을 배치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