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300]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 대통령과 의회의 양립불가인가

최근 국회법 개정안 논란으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의문 한 가지가 풀렸다. 몇몇 새누리당 의원들은 박 대통령에게 걸었던 기대 중 하나가 의회주의자로서의 면모였다고 말하곤 했다. 의회민주주의 개념조차 있는 지 없는 지 모를 우리나라에서 '의회주의자 박근혜'는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말이지만 이번에 논란이 된 국회법 개정안보다 시행령 개정을 더 강하게 강제하는 법안을 공동발의했었다니 그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고 보면 박 대통령은 20년 넘게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국회의원 당선보다 낙선이 경력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서울시장 타이틀이 훨씬 잘 어울리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 비할 바가 안된다.
박 대통령이 원칙과 소신을 내세울 때도 팔 할은 의회가 명분이 됐다. 2000년 국민의 정부 시절 자유민주연합을 교섭단체로 인정하는 것에 반발해 이회창 한나라당 대표가 장외 투쟁을 이끌자 국회정상화를 주장하며 반기를 들었던 그다. 오늘날의 박 대통령이 있게끔한 세종시특별법은 어떤가. 비록 전 정부에서 이뤄진 국회 표결이라도 존중돼야 한다는 그의 흔들림없는 태도는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조지 워싱턴을 꿈꾸며 의회 중심의 내각제 대신 대통령제를 도입한 이후 박 대통령 대에 이르러 겨우 토마스 제퍼슨 시대를 맞이하는 듯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전 대통령이 워싱턴이 되길 거부한 것처럼 박 대통령도 결코 제퍼슨이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입법부인 국회로부터 위임받은 행정입법의 관리 문제를 '입법 독재'로 강변하는 모습에 그를 의회주의자로 믿었던 이들은 교향곡 '보나파르트'의 표지를 찢은 베토벤의 심정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모든 정치적 문제와 같이 '한국식 민주주의'의 척박함으로 귀결될 문제지만 대통령 제는 특히 대통령이 되는 사람을 통해 제도의 완결성을 얻게 된다는 데에 운용의 어려움이 있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대통령이 되는 지에 따라 그 권한과 통치의 형태가 달라질 수 있는 고도의 통치 사상 그 자체로 탄생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행정부에 국한되더라도 한 사람에게 권한을 몰아주는 대통령제는 민주주의와는 다소 위화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대통령제를 탄생시킨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역시 영국의 군주제를 모방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선출 방법과 임기 등 대통령 권한을 제한하는 법적 장치들이 마련되긴 했지만 법으로 정할 수 없는 부분은 고스란히 건국 초기의 대통령들의 몫으로 주어졌다.
대통령제를 탄생시킨 미국 건국 당시 정치적 배경에 대해 마이클 제노비스 로욜라메리마운트대학 정치학 교수는 "미국의 대통령제는 그 직무를 맡게 된 사람들과 그 시대, 시대적 요구에 의해 형성되고 정의되도록 창안됐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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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대통령의 권한은 역사적으로 대통령 개인이 시대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대통령직을 어떻게 활용하고 해석하고 시도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워싱턴이 대통령직을 두 번 연임한 후 스스로 물러나 종신 대통령의 독재 가능성을 차단했다면 제퍼슨은 삼권분립 가치의 우선 순위를 확립해 대통령제의 불완전성을 보완했다.
제퍼슨은 이를 위해 민의를 대표하는 헌법기관으로 의회를 대통령보다 우선 순위에 두고 대통령은 의회가 국민의 의사를 반영해 만든 법률을 충실히 집행하는 행정부 수반의 역할이란 점을 확고하게 정립했다. 대통령과 달리 다수의 합의를 전제로 하는 의회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제퍼슨이 생각하는 대통령 권한의 첫 번째 목적이었다.
단순히 의회가 대통령보다 우월하다고 규정하는 의미는 아니다. 대통령에게 주어진 유형의 권한 뿐 아니라 무형의 권한을 보다 능동적으로 실행해 나갈 수 있는 근거를 국민의 지지와 이를 대변하는 의회의 지원으로 제시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대통령제의 외피를 두른 독재를 장기간 경험한 우리나라에 '의회주의자 박근혜'는 대통령제의 내실을 채워줄 한국의 제퍼슨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독재자의 딸'이 아버지 시대에 어긋났던 민주주의를 바로 잡는다는 거창한 의미가 아니더라도 삼권분립,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토대로 작동하는 대통령제는 다른 누구보다도 대통령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이자 의무로 만들어지는 측면이 크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대통령 박근혜'는 '의회주의자 박근혜'와 양립할 수 없는 존재같다. 국회의원 211명이 찬성한 국회법 개정안을 삼권분립의 훼손이라고 단정지음으로써 국회의 가치를 말살했다. 자구 수정으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막아보려는 국회의 노력도 박 대통령에겐 거추장스러워 보인다. 이쯤 되면 대통령과 의회의 양립불가다. 이것이 2015년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주어진 시대적 요구인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박 대통령 자신의 권한을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의 한쪽 날개를 꺾는 일이다. 의회주의자의 변심으로만 보기엔 너무 극적 반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