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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치사의 산증인이자 진보 진영의 거목(巨木)인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25일 향년 73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70년대 유신 독재에 맞선 민주화 투쟁의 선봉장이었다. 이후 7선 국회의원과 교육부 장관·국무총리를 역임하며 국정 운영의 핵심추 역할을 했다. 그는 1997년 수평적 정권 교체(국민의 정부)에 기여한 것을 시작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정권 재창출을 이끌어낸 주역이기도 했다. 이후 두 번의 대통령 탄핵을 겪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문재인·이재명 정부의 출범에 기여했다.
이 수석부의장은 대학 1학년이던 1972년 10월 유신 선포에 반대하며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돼 1년을 복역하고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다시 2년 6개월을 복역한다. 육군교도소 수감 중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문익환 목사 등 재야 지도자들과 민주화에 대한 꿈을 키웠다.
그가 정당 정치에 뛰어든 계기는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 쟁취한 직선제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주도한 평화민주당에 입당하면서다. 이듬해 13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 지역구에 출마, 민주정의당 김종인 후보를 꺾고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관악을 지역에서만 17대 총선까지 내리 5선을 했다.
1988년은 '초선 정치인 이해찬'을 세상에 각인시킨 해였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청문회에서 그는 평생의 동지인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날카로운 질의로 계엄군의 만행을 파헤쳤고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그는 본인의 선거뿐 아니라 민주 진영의 주요 선거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이끌었다. 1995년 조순 후보를 서울시장으로 당선시키며 '선거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1997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획본부장을 맡아 헌정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1998년 국민의 정부에서는 제38대 교육부 장관, 2004년 참여정부에서는 제36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교육부 장관 재임 당시 고교평준화·연합고사 폐지·보충수업 폐지 등 입시 위주의 교육 현실을 바꾸기 위한 개혁안을 추진했다. 이런 파격적인 정책 추진이 학생들의 학습 능력을 저하했다는 비판을 담은 이른바 '이해찬 세대'라는 말이 등장하기도 했다.
2001년 대통령선거에서도 노무현 후보의 선거대책반에서 활동하며 정권 재창출에 기여했다.
노무현 정부 국무총리로 임명된 그는 의전총리·대독총리로 불리던 당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실세 총리로서 '책임총리제'를 실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총리 시절 행정 수도 이전을 주도하고, 이라크 파병 등을 두고 불협화음을 빚던 당·정·청 관계를 복원하는 데도 기여했다고 회자된다.
이 수석부의장은 19대와 20대 총선에선 세종시에서 당선돼 7선 고지에 올랐다. 특히 2012년 19대 총선에서의 세종시는 신설 지역구이자 총선 전략 지역이었다. 그해 민주통합당 임시전당대회에서 당 대표에 당선돼 정권 재창출에 매진한다. 18대 대선에서 야권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며 지도부 총사퇴를 결의하고 문재인·안철수 후보 단일화를 이끌었으나 대선에서 패배했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김종인 지도부에 의해 컷오프됐으나 무소속으로 세종시에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민주당에 다시 복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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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실시된 조기 대선에서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으며 문재인 정부 탄생에도 기여했다. 그는 대선 후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에 당선돼 21대 총선을 이끌어 대승을 거뒀다. 총 180석(더불어시민당 17석 포함)을 얻어 역대 민주정부의 총선 결과 중 가장 큰 승리를 견인했다.
이 수석부의장은 2020년 21대 총선에서 공동선대위원장을 끝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 당시 치러진 지난 2024년 22대 총선에서도 상임공동선거대책위원장으로 활동하며 175석으로 압승하는 데 기여했다. 총선 승리는 이재명 정부 탄생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도 받는다.
이 대통령은 취임 후 지난해 10월 그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지난 22일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서 베트남 호찌민 출장 중 심근경색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으나 상태가 악화하며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