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핵안보회의와 경찰의 '터진입술'

[기자수첩]핵안보회의와 경찰의 '터진입술'

최경민 기자
2012.04.02 06:00

터진 입술. 초췌한 표정. 눈 밑에 깔린 다크서클. 헝클어진 옷차림…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를 앞둔 지난달 말 강남 지역의 경찰서에서 만났던 한 형사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그는 전날 야근을 서고 다시 오후 근무에 나서고 있었다. 의자에 힘을 빼고 앉아있는 모습에서 "힘들다"는 말이 불필요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당일 발생한 사건을 물어보는 기자에게 만사가 귀찮다는 듯이 '터진 입술'을 힘겹게 움직이며 "저는 모르겠어요. 지금 비상입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라고만 반복했다. 까칠한 반응이었지만 그런 그를 결코 미워할 수는 없었다.

핵안보회의가 다가올수록 경찰들의 휴식시간은 줄어들었다. 경찰서부터 지구대·파출소 인력까지 차출돼 순환근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남 지역 경찰서들은 총 인력의 절반가량을 이번 핵안보회의를 위해 차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핵안보회의가 열리기 수십일전부터 회담 장소인 코엑스 주변 등지에서 훈련(FTX)이 열린 것도 경찰들의 체력을 고갈시키는 데 한 몫 했다. 훈련에 따른 교통통제뿐만 아니라 불시에 발생할 테러에 대비하기 위한 코엑스 일대의 순찰 근무도 모두 경찰의 몫이었다.

이런 사정을 봐주지 않고 쉬지 않고 발생하는 생활 속 사건들은 경찰들의 정신을 힘들게 했다. 한 지구대 관계자는 "안 그래도 사람이 부족한데 신고까지 쇄도하면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다"라고 기자에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피로감은 강남지역의 경찰관들만 느낀 것이 아니다. 전국에서 이번 핵안보회의를 위해 동원된 경찰력은 총 4만여명에 달한다. 지역에서 올라온 경찰들은 서울의 경찰서에 예속된 채 핵안보회의 대비에 힘을 보탰다.

'서울 코뮤니케'의 채택, 출퇴근시간대에 발생한 교통난 등 핵안보회의 이후 많은 이슈가 도마 위에 올랐지만 음지에서 고생한 경찰관들의 노고에 대한 격려의 말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전세계 58명의 정상급 지도자들이 방문한 국가적 행사는 사고없이 무난하게 마무리됐다. 그 뒤에는 야근과 연속근무를 수개월동안 밥먹듯이 하며 교통통제부터 순찰, 질서유지에 이르기까지 맹활약한 경찰들의 '터진 입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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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민 기자

안녕하세요. 산업1부 최경민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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