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인사이트] '합리적 의심'이 없어야 '유죄'라는 원칙의 과도한 적용

# 한여름 바람조차 들지 않는 뉴욕지방법원 내 한증막 같은 방에 남자 12명이 땀을 뻘뻘 흘리며 앉아있다. 뉴욕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배심원을 맡은 이들이다. 한 남성이 칼로 잔인하게 살해됐고, 그의 18세 아들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다.
증거도 있었다. 범행에 사용된 칼과 같은 모양의 칼을 사건 당일 용의자가 잡화점에서 구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범행 장면을 봤다는 목격자도 나타났다. 배심원 12명 가운데 단 한명을 제외한 11명은 이미 마음 속으로 용의자가 '유죄'라는 판단을 내린 상태였다.
모든 것이 끝난 듯한 상황에서 '8번 배심원'이라는 남자가 등장해 반대 주장을 편다.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용의자가 살던 동네에서 직접 구입한 칼로, 범행에 쓰인 칼과 같은 모양이었다. 같은 모양의 칼을 샀다는 것이 꼭 살인을 저질렀다는 뜻은 아니라고 그는 주장했다. 또 목격자인 노인의 눈이 어두워 범행 당시 범인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는 주장도 폈다.
이후 욕설이 난무하는 설전이 벌어졌고, '8번 배심원'은 다른 배심원들을 하나 하나 설득해가며 끝내 국면을 뒤집는다. 결국 배심원단은 용의자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다.
1957년 미국에서 개봉된 영화 '12인의 노한 사람들'(12 Angry Men)의 내용이다. 영화가 반복적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용의자는 무죄다'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무죄일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남아있다면 섣불리 '유죄'를 선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 전세계 대부분 나라의 사법체계에서 채택하고 있는 원칙이다. 우리나라 형사소송법 제307조2항도 '범죄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만에 하나라도 무고한 사람이 누명을 쓰고 옥살이하는 일을 막기 위함이다.
다만 문제는 '합리적 의심' 여부가 법관의 주관적인 판단에 달려있다는 점이다. 현행 형사소송법 제308조에 따르면 '증거의 증명력은 법관의 자유판단에 의한다'라고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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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른바 '낙지 살인사건' 용의자의 살인 혐의에 대해 '무죄'가 확정되면서 뜨거운 논란이 일었다.
대법원은 지난 12일 피고인 김모씨에 대해 "(범인이 아닐수도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해소되지 않았다"며 원심대로 무죄를 확정했다. 김씨는 2010년 여자친구를 살해한 뒤 낙지를 먹다 질식사한 것으로 속여 보험금 2억원을 타낸 혐의로 기소됐다. 피해자의 코와 입을 막아 살해했다면 얼굴 등에 상처가 남아야 하는데, 이 같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재판부의 설명이다.
일각에서는 간접적인 정황 증거만으로는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지난 6월 대법원은 2010년 부산에서 20대 노숙인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손모(여·43) 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당시 증거는 손씨가 인터넷에서 검색한 독극물과 살인 방법 등이 피해자의 사망 당시 증상과 일치한다는 것 뿐이었다. 직접적인 증거가 없더라도 정황 증거가 강력하면 얼마든지 유죄 선고가 가능하다.
결국 '낙지 살인사건'에서 무죄가 선고된 것은 '합리적 의심'을 거두지 못할 정도로 증거가 강력하지 못하다는 재판부의 자유판단에 따른 것인 셈이다. 그렇다면 사건 당시 상황은 정말 '합리적 의심'을 거두지 못할 정도로 불분명할까?
김씨가 당시 전과 9범이었고, 피해자 말고 다른 약혼자도 있었던 것도 확인됐지만 이는 '심증'을 뒷받침하는 것일 뿐 실질적 증거는 될 수 없는 만큼 일단 차치하자.
첫째, 사건 당시 피해자는 치아 질환으로 음식을 씹는 기능이 현저히 저하돼 있었다. 피해자의 어머니는 딸이 치아가 안 좋아 평소 낙지를 먹지 않았다고 전했다.
둘째, 김씨는 당시 피해자와 술을 먹은 뒤 모텔에 들어가기 전 낙지를 주문하면서 2만원 어치는 자르지 말고 통으로 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낙지집 사장은 "통으로는 낙지를 먹을 수가 없다"며 "낙지를 통으로 가져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증언했다.
셋째, 당시 모텔 종업원이 김씨로부터 119 신고를 부탁받고 객실로 올라갔을 때 피해자는 평온한 표정으로 잠을 자듯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산낙지를 먹다 질식에 이를 정도로 호흡곤란을 일으켰음에도 몸부림조차 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술에 취해 잠든 피해자의 입 속에 몰래 산낙지를 집어넣은 뒤 이불로 감싸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을 가능성은 없을까? 혹시 재판부가 '합리적 의심' 원칙을 과도하게 적용해 기계적인 판결을 내린 것은 아닐까? '낙지 살인사건'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