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 과거史 사건배상 엄격한 판결…세금·재산분할 등서도 유의미한 판례 남겨

박병대 법원행정처장(59·연수원 12기)은 가사나 민사 분야에서 기업·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판례들을 남겼다. 과세 관련 소송에서 잇달아 의미있는 판결을 내놓기도 했다. 과거사 사건에 대한 배상 문제에서 엄격한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임명으로 2011년 6월2일 이홍훈 전 대법관의 후임을 맡았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임명을 제청한 마지막 대법관이다. 퇴임한 차한성 전 대법관 후임으로 2014년 2월 법원행정처장을 맡은 뒤 지금은 재판을 하지 않고 있다.
다음은 박 처장의 주요 판결들.
◇ 전원합의체 주심으로 과거사 사건 배상 엄격한 판결
박 처장은 2013년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주심으로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진실규명을 결정했더라도 국가가 바로 유족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라는 취지의 판결을 이끌었다.
전원합의체는 "과거사위원회가 희생자라고 결정한 것은 나름의 조사 방법에 따라 사실을 발견한 것이지만, 이를 토대로 국가 등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것까지 염두에 두고 사실을 확정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과거사위원회가 희생자로 인정한 피해자 가족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던 원심은 파기됐다.
특히 전원합의체는 서로 이견이 있는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이익을 구하는 측이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는 민사소송법의 대원칙을 강조했다.
전원합의체는 "국가가 한국전쟁 전후 불법행위에 관한 진상규명 시도를 은폐하거나 심지어 처벌하기까지 하는 등 막았던 경우도 없지 않고 그 사이 수십년 세월이 지났다"며 희생자가 피해 사실을 엄격하게 증명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적절치 못할 수도 있다고 전제했다.
이어 "그럼에도 과거사위원회가 희생자로 확인·추정하는 결정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신빙성 등을 심사할 것도 없이 사실관계가 다툼의 여지 없이 확정되고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이 반드시 인정돼야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 판결은 사실상 과거사위원회의 결정이 그 자체로 법적 증명력을 가진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놨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전원합의체는 "실제 조사 결과를 처리하는 데 있어 조사관들의 개인적 판단 편차에 따라 모든 기준이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다" "조사관의 주관적 해석·평가·선별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등 그 내용의 신뢰성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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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혼할 때 빚도 나눠야"
박 처장이 주심을 맡은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3년 6월 부부가 이혼할 때 빚이 재산보다 많아도 분할 청구를 할 수 있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전원합의체는 한 부부가 서로를 상대로 낸 이혼 등 소송에서 재산분할 청구를 기각한 원심을 파기했다.
심리 대상이 된 부부는 아내가 남편의 활동비 등을 대기 위해 수억원을 빌렸고, 이후 이혼에 이르렀다. 이혼 소송을 낼 당시 아내의 이름으로 된 재산으로 모두 빚을 갚아도 4000여만원의 빚이 남는다는 계산이 나왔다.
기존 판례는 부부의 재산 총액에서 빚을 제외하고 남는 금액이 없는 경우 재산분할을 허용하지 않았다. 1·2심은 이같은 판례를 따라 "채무에 대해서도 재산분할을 해 달라"는 아내의 청구를 기각했다.
그러나 전원합의체는 기존 판례를 뒤집었다. 박 처장을 비롯한 대법관 8명은 "채무 총액이 적극재산을 초과해 재산분할을 한 결과 결국 채무를 분담하는 결정이 되더라도 재산분할이 가능하다"고 판단,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이 판결은 기존 판례의 문제를 해소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존 판례는 배우자 중 한 명이 이혼한 뒤 빚을 모두 떠안게 돼 형평에 맞지 않고 재산분할 제도 취지나 양성평등에 반한다는 지적이 잇달았다.
다만 일부 대법관들은 "남편의 실직이나 사업실패로 지게 된 빚을 전업주부인 아내가 부담하는 등 부당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며 빚에 대해서는 재산분할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반대 의견을 냈다.
◇ "오랫동안 사용해 '식별력' 생겼다면 상표권 인정"
박 처장은 또 상표를 오랫동안 사용해 식별력이 생겼다면 상표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판례를 남겼다.
특정 상표가 붙은 상품을 다른 상품과 구별할 수 있는 경우 '식별력이 있다'고 한다. 식별력은 상표로 인정받기 위한 핵심 조건이다.
기존 대법원 판례는 상표를 등록한 이후 지속적으로 사용해 다른 상품과 구별할 수 있게 되더라도 상표권을 보호받을 수 없다고 봤다. 등록 시점에 상표권을 인정받기 위한 조건인 식별력이 없었던 만큼 그 권리를 보장해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박 처장이 주심을 맡은 전원합의체는 2014년 3월 유명 브랜드 뉴발란스 운동화 옆면의 'N' 표장에 식별력이 있다고 인정했다. 뉴발란스가 국내 운동화 제조업체를 상대로 낸 상표권 권리범위 확인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한 것이다.
전원합의체는 "상표의 일부 구성이 등록될 당시 식별력이 없었더라도 상표를 사용함으로써 권리범위를 확인하는 시점에 이르러 식별력을 가지게 된 경우 이를 기초로 상표가 유사한지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 세금 관련 소송에서 의미 있는 판례
이밖에 박 처장은 세금 소송에서 의미 있는 판례들을 남겼다.
박 처장이 주심을 맡은 전원합의체는 2012년 10월 납세자 3명이 "증여세와 가산세 부과처분을 취소해달라"며 서울 강남세무서장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했다. 가산세는 종류가 다양하고 산출 근거가 제각각인 만큼 세액과 산출 근거를 명시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특히 전원합의체는 "가산세가 납세 의무를 위반한 이들에게 부과하는 일종의 행정제재인 만큼 절차를 더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며 "종류별로 세액과 산출근거를 구분해 기재함으로써 납세의무자가 과세처분 내용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당연한 원칙"이라고 지적했다. 이 판결은 가산세를 부과할 때 근거를 자세히 명시하지 않는 기존 과세 당국의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이에 앞선 2012년 1월에도 박 처장은 전원합의체 주심으로서 '자회사를 통해 취득한 법인 지분이 총 51%를 넘으면 모회사를 과점주주로 보고 취득세를 물려야 한다'는 판결을 이끌었다.
전원합의체는 당시 이같은 취지로 네덜란드 법인이 "취득세 등을 부과한 처분을 취소하라"며 서울 종로구청장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했다.
현행 지방세법은 법인 지분을 51% 이상 취득하는 과점주주에게 취득세를 부과하도록 규정한다. 이를 피하기 위해 네덜란드 법인은 100% 출자한 자회사 2곳을 통해 부동산 회사 지분을 50%씩 분산 취득했다.
이에 종로구청이 취득세를 부과하자 법인 측은 소송을 내 1·2심에서 모두 승소했다. 그러나 전원합의체의 판단은 달랐다.
전원합의체는 "완전한 지배권을 통해 자회사들이 취득한 지분을 실질적으로 지배·관리하고 있어 실질적 과점주주로서 취득세를 납부할 의무가 있다"며 "형식에만 치중해 납세 의무가 없다고 본 원심은 법리를 오해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