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오늘] 전두환 신군부 5·17 비상계엄 통해 정권 장악한 뒤 휴업령 해제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 직후 국회와 정부는 유신헌법 철폐를 위한 개헌 논의를 진행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민주적인 헌법 개정을 약속했고 정치적 억압도 완화하기로 했다.
하지만 12·12사태와 함께 등장한 신군부는 민주화 움직임을 후퇴시켰다. 폐지됐던 정보처가 부활했고 민주화 여론은 짓밟혔다.
대학가와 정치권에선 점점 권력을 강화하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경계했다. 1980년 5월부터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행동으로 이어졌다.
서울대 총학생회를 비롯해 전국 총학생회 회장단은 가두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대학생 10만명이 서울역에 결집하는 등 전두환 퇴진과 민주화 일정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고조됐다.
신군부에겐 시간이 없었다. 국회에서 대통령 직선제 등을 담은 민주적 개정안 작업이 끝났고 5월20일 본회의 통과만이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신군부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빌미로 위기감을 조성하고 같은 달 17일 자정 비상계엄을 확대·선포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계엄포고 10호'를 발표하고 △모든 정치활동 금지 △정치 목적의 옥내외 집회·시위 금지 △전문대학을 포함한 각 대학의 휴교 △정당한 이유없는 직장 이탈이나 태업·파업행위 금지 등을 선포했다.
이때 김대중·김종필·등 정치인들이 불법 연행됐고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가택 연금 처분이 내려졌다. 5·17 조치가 발표되자 광주시민들은 강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5·18 민주화 운동을 국가 내란이란 이름 아래 유혈 진압했다. 당시 계엄군의 작전명은 '화려한 휴가'였다.
정권 장악에 반대되는 세력을 모두 진압한 신군부 세력은 초헌법적 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해 실질적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전국 4년제 대학에 내려졌던 휴업령은 5·17 조치 후 약 3달 뒤인 1980년 8월28일에 전면적으로 해제됐다. 계엄사령부는 "대학 개강일인 9월1일부로 휴업령을 전면 해제한다"고 선포했다.(계엄포고 14호)
앞서 6월19일에는 교대와 간호전문대, 의·치대 4년, 특수대학원에 한해 1차로 개강을 허용했고, 7월11일에는 2차로 전문대학의 휴업령을 해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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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통제도 이어졌다. 당시 한 언론은 휴업령 해제에 대해 "그동안 각 대학에서 면학분위기를 해쳐온 각종 요인들을 모두 제거하는데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 판단된다. 새 시대의 출범과 때를 맞춰 학원정상화도 조속히 이루기 위해 내려진 조치"라고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