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책방도 사라진 서촌…"월세 두 배 받아줄게" 사칭 동원한 건물 사냥

한강 책방도 사라진 서촌…"월세 두 배 받아줄게" 사칭 동원한 건물 사냥

이현수 기자
2026.08.03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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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한전 사칭해 건물주 연락처 요구…상인들 불안
한강 작가 책방도, 20년 지킨 갤러리도 떠나
전문가 "문화공간 사라지면 지역 경쟁력 잃는 것"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서촌의 한 건물 모습. 한강 작가의 서점 '책방오늘'이 자리했던 공간이 비어 있다./사진=이현수 기자.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서촌의 한 건물 모습. 한강 작가의 서점 '책방오늘'이 자리했던 공간이 비어 있다./사진=이현수 기자.

"법원에서 등기가 왔다면서 건물주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어요."

서울 종로구 서촌에서 11년째 식당을 운영하는 김진실씨(가명·62) 가게에는 최근 낯선 손님이 부쩍 늘었다. '신호등 공사를 해야 한다'거나 '수도를 교체해야 한다'며 건물주 연락처를 묻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목적은 공사가 아니었다. 이들은 건물을 매입하려는 부동산 업자들이었다.

서촌에서 부동산 매입 경쟁이 과열되면서 상인과 주민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일부 중개업자들은 법원이나 공공기관을 사칭해 건물주 연락처를 알아내고, 집요하게 매각을 권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건물이 거래된 뒤에는 명도 요구와 임대료 인상이 이어지면서 1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상인과 문화공간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

지난달 30일 서촌에서 만난 김씨는 "거절하면 다른 사람이 또 찾아온다"며 "나중에 알고 보니 건물주에게 '월세를 두 배로 받아주겠다'며 세입자를 내보내라고 권유했다더라"고 말했다. 이어 "내년 이맘때는 이 가게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크다"고 말했다.

인근 부동산들도 상황은 비슷하다고 입을 모았다. 서촌에서 20년째 공인중개사를 하고 있는 60대 이모씨(가명)는 "중개법인들이 법원이나 한국전력을 사칭해 건물주 연락처를 알아내고, '비싸게 팔아주겠다"고 접근한다"며 "건물이 팔리면 새 건물주가 세입자를 내보내고 임대료를 몇 배로 올리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월세가 1500만원에서 3000만원으로 뛰어 결국 문을 닫은 갤러리도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공인중개사 최모씨(63)는 "2~3년 전부터 강남권 중개법인들이 서촌에 나타나더니 지난해부터 심해졌다"며 "하루에도 몇번씩 연락하고 집까지 찾아오니 건물주들이 놀라서 상담하러 오는 경우도 적잖다"고 말했다.

주민들도 피해를 호소한다. 서촌 한옥에서 30년째 살고 있는 70대 김모씨는 "몇 달 동안 양복 입은 젊은 남성이 매일 찾아와 한옥을 팔라고 했다"며 "거절해도 계속 찾아오고 우편물도 수십 통씩 보내 협박받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왼쪽부터)서울 종로구 서촌 일대 건물주들에게 발송된 강남권 중개법인의 건물 매각 유도 광고물, 서촌 한옥 거주자의 집에 중개업자들이 메모를 붙여놓은 모습./사진=독자제공.
(왼쪽부터)서울 종로구 서촌 일대 건물주들에게 발송된 강남권 중개법인의 건물 매각 유도 광고물, 서촌 한옥 거주자의 집에 중개업자들이 메모를 붙여놓은 모습./사진=독자제공.

서촌을 대표하던 문화공간들도 잇따라 사라지고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의 서점 '책방오늘'은 건물을 매입한 기업의 명도 요구로 지난달 문을 닫았다. 박노해 시인이 설립한 비영리단체 나눔문화가 14년간 운영한 '라 카페 갤러리'도 임대료 인상을 감당하지 못해 지난 3월 영업을 종료했다.

상인들은 서촌만의 문화자산이 사라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김진실씨는 "한강 작가의 책방은 동네의 자랑이었다"며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엔 식당에도 문턱이 닳을 정도로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이어 "서촌의 서원과 갤러리, 서점들이 있어 위로받으며 버텼는데 이제 그런 공간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김성수 대중문화평론가는 "예술가들이 만든 문화공간이 지역 가치를 높이면 이후 부동산 자본이 유입돼 기존 주민과 상인들이 밀려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며 "한강 작가의 책방처럼 전세계 독자들이 찾는 공간이 자본 논리로 사라지는 건 지역의 문화 경쟁력을 잃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역사와 문화를 품은 공간을 지켜내는 정책적 고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서촌 골목 모습. 20여년간 자리했던 갤러리가 떠난 자리가 비어 있다./사진=이현수 기자.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서촌 골목 모습. 20여년간 자리했던 갤러리가 떠난 자리가 비어 있다./사진=이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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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수 기자

사회부 사건팀 이현수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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