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대동아 공영권"은 살아 있다
몇 년전 한 번역서를 뒤적이다가 괜히 우울해진 적이 있다. 북위 요 금 원 청등 중국 북방왕조의 통치체제를 연구한 책이었는데,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발간된 이 일본서적을 번역하면서 옮긴 이는 착잡한 심정을 서문에 남겼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구상을 뒷받침하는) 이 책의 검은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나, 그 내용에 학문적 왜곡이 적고 출간후 48년이나 지났지만 아직 이를 능가할 저작이 나오지 않아 번역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후학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비장함이 서려있었다. 이 책이 번역된 게 한중수교 전인 1991년이었으니 지금은 사정이 꽤 달라졌으리라.
요즘 일본의 대중국 정책은 어떠한가. 그 용의주도함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중국과의 무역 현황을 보자. 중국통계로 지난해 대일수출이 484억달러, 수입이 534억달러로 50억달러 중국의 적자다. 그런데 일본통계에는 지난해 대중국 수출이 298억달러, 수입이 557억달러로 무려 259억달러나 일본쪽 적자로 기록된다.
수수께끼의 열쇠는 홍콩의 존재다. 일본통계상 대홍콩 수출이 254억달러, 수입은 겨우 14억달러로 일본의 240억달러 흑자였다. 일본의 대중국 교역 실상은 홍콩이라는 교란요인을 제거해야 근사치를 추정할 수 있다. 중국의 1국가 2체제를 이용한 눈속임 통계다.
그런데 중국통계로도 수교이후 일본은 매년 중국과의 무역수지를 거의 비슷하게 유지해 왔다. 양국간 경제력의 차이를 감안하면 도저히 믿기 어려운 숫자다. 지난해 한국이 중국과의 교역에서 145억달러(중국통계) 흑자라는 비판을 사고 있음을 생각해 보라.
일본의 주도면밀함에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조차 느껴지며 으시시해 진다.
이미 일본은 인구 13억의 중국을 단일국가로 생각지 않는다. 황해 연안 경제특구를 중심으로 인구 1억 안팎의 몇몇 권역으로 나눠 그 특성에 맞게 대응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베이징-텐진의 IT, 둥베이(東北)3성의 중화학, 산둥(山東)성의 농산물가공, 창장(長江)삼각주의 금융·상업, 광둥(廣東)성의 부품산업 등이 그것이다.
일본의 민관은 이들 권역을 아예 동북아의 개별국가처럼 취급한다. 예컨대 상하이(上海) 장쑤(江蘇)성 저장(浙江)성이 포함된 인구 1억4000만의 창장삼각주. 지금 성장세라면 이 권역은 2-3년내 국민총생산(GNP) 규모에서 한국을 앞지를 것이라는 예측까지 던진다.
일본의 각 대학에는 중국어 강좌가 북경어 뿐 아니라 광둥어 푸젠(福建)어 쓰촨(四川)어 등으로 나눠 개설된 지 오래다. 일본의 파 시금치 고구마 씨앗을 산둥반도로 가져가 기른 뒤 수입해 먹으면 국민 편익은 더 커진다고 생각해 그렇게 실행하고 있다.
그들의 대동아공영권 구상은 시퍼렇게 살아있는 것이다.
새 정부의 `동북아 중심국가`비전은 일본의 이같은 전략과 행보를 정확히 의식하고 그에 맞설 수 있는 획기적 전략과 수단을 갖추었으리라는 희망을 부풀렸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18번이나 동북아 중심을 들먹이며 전세계에 천명했기에 기대는 더욱 컸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정부는 3월20일 대통령 주재 청와대회의에서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이라는 표현을 당분간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날 미리 배포된 대통령의 경찰대 졸업치사중 동북아 중심국가라는 구절도 긴급 수정됐다고 한다.
27일 확정된 새 정부 5년간의 경제운용 방향에는 동북아 경제중심 국가건설 항목아래 경제자유구역법 시행, 동북아 물류중심 육성 등 낯익은 단어들만 나열돼 있다. 이것도 참여정부의 실험이라면 더 할 말은 없다. 가슴이 답답하다.